인상적인 구절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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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인터페이스는 저널리즘 너머의 지형에 대한 연결장치를 제공한다. 언론이 보도하는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 언론이 그 정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단순한 기록을 기사화하게 해주는 규범, 기사를 생한하는 이유인 대중과 언론이 발전시켜온 관계 등이 그 연결장치의 예다. 저널리즘은 원재료의 상당수를 엘리트로부터 얻는다. 규범은 저널리즘이 해당 원재료에 에대한 입장을 정하고 일관된 기사 형태로 구성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수용자들은 궁극적으로 일상생활에 저널리즘을 결합시키고 사회적, 정치적 행동에 참여함으로써 그 원재료에 의미를 부여한다.
저널리즘이 이 인터페이스드르을 생각하고 대하는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더 더온전히 현재 상황에 맞게 조정된다면, 각 인터페이스는 저널리즘을 그 자신이 속한 세계와 다시 연결시켜 사회적 적실성을 회복할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그들의 고전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서 "저널리즘의 주요 목적은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고 자치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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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디지털 뉴스 시대의 첫 사반세기는 뉴스를 위한 수용자의 존재가 더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상업적 웹을 필두로 모바일 커뮤니케이션과 소셜미디어의 잇따른 등장은 수용자를 뉴스로부터 다른 유형의 콘텐츠로 집단적으로 이주하게 만들었고, 이는 온갖 종류의 제도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뉴스 영역에서는 '가정된 수용자에서 알게 된 수용자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모든 수용자의 행위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통해 언론인과 언론사는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지식은 공적 이슈를 다룬 뉴스에 대한 수용자의 선호도가 언론인들의 관행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냈다.
수용자들의 뉴스 이용 관행과 선호도는 변하는 반면 언론인들의 뉴스 생산 관행과 선호도는 굳어진 이 기괴한 상황이야말로 저널리즘이 자신이 봉사해야 하는 대중과 얼마나 동떨어진 세계관을 가져왔는지를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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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연구소의 2020년 <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당파성의 증가와 뉴스 신뢰 감소 사이의 연관성이다. 즉, 높은 수준의 정치적 당파성은 수용자의 뉴스 신뢰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 방식을 거쳐 여과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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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국의 언론은 권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자유주의 원칙을 고집하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는 듯하다. 이 시점에 우리는 그다음은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선거에서 패배했고, 유럽에서는 권위주의적 조류가 물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를 자유주의의 수호자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의 전복을 시도하는 엘리트라면 누구든 관계없이 그와 맞서는 저널리즘을 보게 될 것인가? 엘리트 지향적 저널리즘이 자유주의적 규범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유색인종, 소수민조, 성소수자 등 억압받아온 이들에게 그 임무를 다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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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무슬림에 대한 힌두교의 폭력을 비판한 언론사들이 불시에 폐쇄 조치 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때 관료들은 언론 자율성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 '책임 있는 자유'를 언급했다. 당시 판사는 "자유란 당순히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지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드높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훈계했다.
언론인들은 무감각하게 일률적으로 규범적 행동에 사회화된다고 여겨진다. 래윈 코넬의 "복종에는 보상이 따르고, 일탈에는 처벌이 따른다"라는 말이 이를 잠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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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은 "무엇이 뉴스인지 결정하는"과정이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기자와 에디터들은 일련의 규범에 의존하는데, 이 규범은 특정 주제와 정보원을 다른 것보다 더 뉴스 가치가 높은 것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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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우선주의에 기반을 둔 고집떄문인지 오보와 가짜뉴스는 마치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취급되는데, 사실 이 현상은 식민주의와 착취의 오랜 역사 속에서 다뤄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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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의 수용자를 알아가면서 언론사들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고 있다. 첫째, 독자들은 뉴스에 돈을 많이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2020년<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모든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온라인 뉴스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독 수익 감소는 광고 수익 급락과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광고 수익은 소비자의 관심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트래픽 데이터는 이런 관심이 뉴스보다 소셜미디어와 검색 습과에 훨씬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의 디지털 디스필레이 광고 수익 전체의 약 53%를 페이스북과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이 거둬들이고 있다. 이는 결국 뉴스에 대한 수용자의 관심이 생각보다 크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뉴스 사이트에 방문하는 이용자들이 언론사들이 역사적으로 사회 내 의제를 설정한다고 믿어온 국가적, 국제적, 경제적 이슈들보다 날씨, 버모지, 스포츠, 셀럽 등의 주제를 다룬 콘텐츠에 훨씬 더 주목한다는 연구 결과들에 의해 확실시 된다. 즉, 저널리즘이 현실세계와 충격적일 정도로 유리되어 있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137P
언론인들은 포용성, 사회정의, 코스모폴리타니즘 등의 대안적 규범을 수용해야 한다.
(코스모폴리타니즘: 일반적으로 인종, 민족, 국가 등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똑같은 의무와 권리를 갖는 평등한 세계 시민 혹은 동포로 보는 입장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포용성이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복잡성을 평준화하지 않으면서 전달하는 저널리즘을 뜻한다.
포용의 역학을 바탕으로 개혁된 저널리즘은 사회정의를 21세기의 필수 규범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언론인들은 코스모톨리타니즘을 직업적 규범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140P
우리는 언론인들이 수용자를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크 ㄴ변화인지 논의한 바 있다. 이는 20세기 저널리즘의 대붑ㄴ이 수용자와 가능적 거리 유지를 "전문성"의 본질로 보았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전문성을 이런 식으로 판단함으로써 언론인들은 외부인의 선호를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배제할 수 있었다. 수용자는 언론인의 의뢰인이었고 다른 전문인과 의뢰인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게 수용자는 언론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수용자가 갑자기 선택 의지와 능력을 갖게 되면 저널리즘의 전문성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혼란은 부분적으로 의뢰인 기반 전문성 모델에서 비롯한다. 이 모델은 의학계와 법조계를 모방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전문직 종사자가 수용자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치듯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가, 예술가가 대표적인 예이고, 창작직군에 속한 전문인은 대부분 그렇다. 어쩌면 언론인은 이제 스스로를 변호사나 의사보다는 재즈 뮤지션, 배우, 댄서, 시각 예술가처럼 생각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재즈 뮤지션 중 누구도 공연할 떄 청중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그들의 전문성을 떨어뜨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