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오프로드 여행 38

불씨, 초원의 밤을 지키는 영혼

by 만보

불씨, 초원의 밤을 지키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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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젓가락으로 난롯불을 지피다.


초원의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해가 지자마자 낮 동안 가득했던 열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초원은 금세 싸늘한 기운에 휩싸인다. 그 차가움은 마치 검은 바람처럼 게르 안으로 스며들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여행 넷째 날, 우리가 머문 게르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낮에는 햇살에 구워지는 듯 뜨거웠지만, 밤이 되자 초원은 돌연 얼음장이 되어 우리를 시험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난로다. 불 없이는 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산골 주말 오두막에서 장작을 지펴왔던 나에게는 불을 붙이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영우씨와 덕종씨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모아둔 나무젓가락을 불쏘시개로 삼으려 하자, 영우씨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형님, 그 젓가락을 뭐 하려고 모아두었어요?”

“불쏘시개로 쓰려고요.”

그의 표정은 반신반의했으나, 불꽃이 점차 살아나는 모습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기후씨는 빙긋 웃었고, 나도 미소로 답했다. 예전에 내가 젓가락을 버리는 모습을 보고 기후씨는 아껴 모아두었다가 밤에 불쏘시개로 사용하면 좋다고 했던 기억이 났기에 미소로 답한 것이다. 타오른 작은 불씨는 게르를 덥히는 난방의 불이면서, 그 불은 긴 여행의 피로를 덜어주고, 마음을 달래고, 낯선 초원의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상징적인 기호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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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들에게 불은 여러 층위를 가진 생활 도구다. 불은 곧 삶의 중심이며, 신성한 존재다. 게르 안의 난로는 그저 연기를 내뿜는 철제 구조물이 아니라, 가족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불을 지키는 행위는 곧 조상을 기리고, 가정을 지키는 약속과 같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불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큰 금기로 삼는다. 불에 침을 뱉거나 발로 차는 일은 한 번의 실수와 같은 무례함을 한참 넘어선 행위로 간주한다. 그리고 가문의 수호신을 모욕하는 행위로 여긴다. 그들에게 불은 살아서 숨 쉬는 존재다.


불씨는 나눔이다.


새벽녘, 싸늘한 공기에 잠에서 깼을 때, 난로가 이미 꺼져 있음을 느꼈다. 불이 꺼지자 게르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고, 숨결조차 희미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이불을 털치고 일어나 다시 불을 살렸다. 영우씨와 덕종씨는 추었는지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장작을 올려놓자 서서히 불꽃이 살아나면서 게르 안에 따뜻한 기운이 번져 갔다. 엊저녁 라이터를 빌리러 왔던 기후씨가 문득 떠올랐다. 밖에 나가 그의 게르 쪽을 바라보니, 연통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이미 난롯불이 꺼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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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게르 문밖에서 기후씨를 불렀다. 바로 대답이 왔다. 아마도 추위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난로에 불씨를 옮겨 주자, 불꽃이 되살아났다. 게르 안에 금세 온기가 퍼졌고, 기후씨는 연신 고맙다고 말한다. 그의 감사 인사 듣기가 민망해 화제를 돌렸다.

“승일이는 좀 어때요?”

전날부터 배앓이를 앓던 그의 막내 아들 승일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불이 살아나면서 아이의 건강도 함께 회복되리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불은 언제나 나누어져야 한다. 혼자만의 불은 오래 가지 못한다. 옆 게르의 불이 꺼진 것은, 곧 내 불도 꺼진 것이나 다름없다. 유목민들이 공동체 안에서 불씨를 서로 나누어 온 까닭이 여기에 있음이다. 불은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었다. 사냥과 이동, 거친 자연 속에서 불은 생명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패였다. 불은 언제나 공동체적인 존재였다. 혼자서는 불을 오래 간직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함께 지키고 함께 돌봐야 했다. 몽골의 게르에서 불이 신성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은 과학으로 말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삶과 관계와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다.


후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나는 그 새벽의 푸른 기운을 선명히 기억한다. 게르의 난롯불은 사라졌지만, 그 순간의 온기는 아직도 내 안에서 살아 있다. 주말 산골살이 마당에서 불멍을 할 때마다 몽골의 새벽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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