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바람을 맞으며 오프로드 여행을 하다 보면, 작은 것 하나가 큰 위안이 되곤 한다. 먼지에 절은 얼굴, 하루 종일 차 안에서 흔들린 몸, 그리고 길 없는 길을 따라가는 긴장감 속에서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 그것은 흔히 먹던 커피라기 보다, 여행길의 쉼표이자, 입안에서 피어나는 작은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믹스커피 한 통을 준비했다. 20개들이 포장, 언제 어디서든 꺼내서 마실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다. 저녁 식사 후, 게르 앞에서 주전자에 물을 올려 끓이고 있으면,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주전자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영우씨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형님, 믹스커피에 블랙커피를 3분의 1 정도 섞으면 훨씬 맛있습니다. 진하면서도 달콤해요. 제가 한번 제조해 드려볼까요?”
처음 듣는 조합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기후씨가 장난스럽게 한마디 거들며,
“그거 믹스커피에 대한 모욕 아니야?”
모두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막상 한 모금 마셔보니, 그 맛이 꽤나 그럴듯했다. 평소보다 진한 향과 깊은 맛, 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부드러운 달콤함. 나는 감탄하며,
“나도 이제부터 이렇게 조제해서 마셔야겠는걸…”
그 말에 영우씨 어깨가 으쓱 올라갔고, 잠시 커피 박사가 된 듯 커피 지식이 이어졌다. 여행길에서 이런 소소한 대화와 웃음은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 된다.
커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017년 홉스골 오프로드 여행의 기억이 떠올라 동행자들에게 나의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했다. 그때 부부 한 쌍이 동행했는데, 원두와 그라인더, 드립 필터까지 완벽하게 챙겨온 정성스러운 분들이었다. 저녁이 되자, 별빛 가득한 게르 앞에서 그분들이 나를 초대했다.
“이런 곳까지 왔으니, 은하수 아래에서 드립커피 한 잔 즐겨보시지요.”
나는 그 낭만이 마음에 들었기에 흔쾌히 응했고, 은은한 원두커피 향과 별빛이 어우러진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분이 게르로 찾아와 뜻밖의 부탁을 했다.
“혹시 믹스커피 여유 있으면 몇 개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의아해서
“원두커피 다 드셨어요?”
그분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니요, 이상하게 믹스커피가 생각나네요.”
이야기를 마치자, 덕종씨는,
“원두커피가 패배했네요.”
그 말에 모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한 원두커피 드립 세트가 무색할 정도로, 여행길에서는 믹스커피의 달콤한 유혹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흔쾌히 믹스커피를 건넸고, 그때의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잔잔하게 남아 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기후씨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혹시 그 부부, 승마복 세트로 준비하셨던 분들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영우씨와 덕종씨가 한참 웃더니,
“대단한 분들이셨네요.”
그날 밤, 초원의 달빛은 별빛보다 환하게 달콤하게 따스하게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그 맛을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 달콤한 커피향 속에 웃음이 배어들고, 달달한 여운은 차가운 밤공기와 어우러져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달달한 믹스커피의 여운
초원에서 믹스커피는 그저 그런 인스던트 식품에서 벗어난 존재다. 나에게는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였고,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작은 휴식이었으며, 추억을 불러내는 열쇠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경험한 어느 작가 또한 동의한 바 있음을 조심스럽게 밝힌다. 달빛 아래에서 웃음을 나누던 순간, 그리고 입안 가득 번지던 달콤함은, 아마도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서 따뜻한 향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영우씨가 알려준 믹스커피 조제법을 가끔 집사람과 가끔 마신다. 집사람은 새로운 진한 맛이 좋다는 반응이고, 어느 한 분야의 무림 고수는 정말 많다고 말한다.
후기; 이 글을 쓰고 난 후, 카페에서 겪었던 일이다.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데, 할머니 네 분이 우르르 들어오셨다. 그중 한 분이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난 예가체프 아니면 안 먹어.” 순간 ‘예가체프가 대체 무슨 커피이길래?’하는 호기심에 스마트폰을 꺼내 바로 검색했다. 화려한 향과 부드러운 산미로 유명한 고급 원두라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영우씨 믹스커피 조제법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