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과 항해의 사이에서

by 만보

멈춤과 항해의 사이 - 실존주의 관점에서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외로운 항해_축소.jpg


달콤한 그늘에서 관찰자의 시선


십여 년 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의 해변. 휴가라는 이름의 달콤한 자기 보상 속에 있었다. 쨍한 햇살 아래, 파라솔의 너른 그늘은 세상의 모든 불안과 책임을 가려주는 듯했다. 손에 든 망고 셰이크는 그 달콤함만큼이나 제 일상에 아무런 결단도 요구하지 않는 안락함을 상징했다. 그때의 나는 완벽하게 '정지된 존재'였다. 삶의 궤도에서 잠시 내려와, 세상의 흐름을 안전하게 관망하는 관찰자에 불과했다.


그러다 문득,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위에서 한 점의 실루엣이 시선을 붙잡았다. 한 젊은이가 홀로 패들보드 위에 서서 묵묵히 노를 젓고 있었다. 거대한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에 비해 그는 너무나 작고 고립된 존재였다.

‘이 넓은 곳에 홀로 던져진 인간’

이 장면은 나를 안락한 휴가 모드에서 끌어내,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고독한 젊음의 자유의지


그 젊은이의 모습에서 나는 자유로움과 용기를 읽었다. 그의 등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그 방향은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이 아닌 미지의 수평선이었다. 파라솔 아래의 나에게 안락함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었다면, 그에게 자유는 홀로 패들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고 노를 젓는 그 행위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느낀 '선택과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의 실체였다. 그는 환경에 순응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바다, 즉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세상의 부조리' 한가운데서도, 그는 ‘나는 나 스스로 나의 길을 결정한다.’는 결단, 앙가주망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의 행위는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타인이나 운명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선택과 책임만으로 자신의 본질을 창조하는 진정한 자유의지의 증명처럼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왜 가야 할지는 오로지 그 젊은이만이 아는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노를 젓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고독한 노젓기는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는 고독하고 용감한 주체의 상징이었다.

파라솔 아래의 나는, 어쩌면 '망고 셰이크를 마시며 휴가를 즐겨야 하는 한국에서 온 직장인'이라는 정해진 역할에 만족하며, 내 삶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을 잠시 회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사회가 정해준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했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실존적 불안을 달콤한 휴식으로 덮으려 했다. 이처럼 스스로를 고정된 역할로 규정하고 자유를 외면하는 태도가 바로 자기기만이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그 모든 안정된 규정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바다 위로 나섰다. 그는 ‘나를 규정하는 어떠한 이름도, 역할도 없다. 노를 젓는 행위로써 나의 다음 순간을 창조할 뿐이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이 움직이는 존재와 멈춰선 관찰자 사이의 대비는 나에게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요구했다.


나의 노를 찾아서


결국 그 젊은이의 모습은 나에게 휴가를 끝내고 돌아갈 일상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갖도록 자극했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절망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가 있기에 절망할 수 있고, 절망을 통해 비로소 참된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가르치는 용기의 철학이다.


나는 망고 셰이크를 내려놓았다. 그 젊은이처럼 거대한 바다로 나아갈 필요는 없지만, 나의 일상의 좁은 영역 안에서라도 누군가가 정해준 길이 아닌,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나만의 노를 찾아 젓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파라솔 아래의 안락함이 아닌, 고독하지만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날 캄보디아 해변에서 내가 포착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실존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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