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 냄새를 따라

by 만보

들깨 냄새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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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실레마을을 걸었다. 멀리서부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길을 따라가 보니, 할머니가 들깨를 터는 모습이 보였다. 들깨를 올리고 내리고 막대기로 탁탁 털어내는 손짓이 마치 오래된 벽시계 추처럼 규칙적이었다.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집 마당에서도 이런 풍경이 있었다. 그 옆에서 들깨 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참을 놀았다. 들깨 냄새, 볕에 말린 까만 줄기, 겨울로 접어드는 기운이 실린 건조한 공기, 그 시간이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처럼 다시 내 곁으로 왔다.


들깨 터는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일에 세월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비닐포대 위에 떨어지는 들깨 작은 점들이 ‘또 한 해가 이렇게 지나간다.’는 사실을 서둘러 알려주는 듯했다. 농사일은 누구보다 계절의 속도를 잘 아는 사람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봄에 심고 여름에 키우고 가을에 걷는 순환. 그 속에 스며 있는 시간의 무게다. 그 무게를 견디고 살아온 사람은 늘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그 손은 늘 삶을 정직하게 말한다.


잠시 카메라를 내리고 할머니의 일정한 벽시계 추 동작을 바라보았다. 들깨를 털 때마다 공기 속에 작은 먼지가 피어오르고, 그 미세한 움직임에 따스한 빛을 얻었다. 그 순간은 삶의 한 줄처럼 느껴졌다. 많은 일이 지나가고 계절도 수없이 돌아가지만, 결국 삶은 이처럼 누군가의 손끝에서, 바람 속에서, 흔적 남기는 작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들깨가 쌓여 있었고, 뒤에는 벌써 어느 정도 작업을 마친 줄기 더미가 놓여 있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풍경이었지만, 그 평범함 속에는 묵묵히 한 해를 살아낸 사람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기특하고, 조금은 고마운 장면.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눈앞의 이 장면이 언젠가 또 하나의 기억이 될 것 같아서였다. 들깨를 털며 계절을 넘기는 모습은 노동을 넘어, 흘러가는 시간을 한 움큼 붙들어 두는 행위처럼 보였다.


실레마을은 실레마을처럼 조용했고, 바람은 가볍게 불었다. 들깨 떨어지는 소리가 들판의 넓은 공간을 메웠다. 그 소리 속에서 내 지난 날의 어떤 계절, 어떤 얼굴들, 어떤 냄새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러했기에 풍경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인지 들깨 냄새가 코끝에서 떠나질 않았다.

손끝에서 삶은 조용히 흘러가지만, 한 계절 전체의 기억이 되고, 한 시대의 풍경이 되고, 어떤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들깨 냄새가 가득하던 그날 오후, 계절이 한 번 더 넘어가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조용히, 조용하게.


지난 사진과 메모장을 정리하면서 이 글을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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