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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렌 Jan 17. 2021

마사 누스바움 - 타인에 대한 연민

1월 (벌써 3회차) 독서모임 <동네북>의 공통 서적은 마사 C.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우리 독서모임은 1회차 후기에도 썼듯, 공통 서적 선별을 위한 각자의 책 추천 시간이 있고 이 책을 사다리 타기해 고르는 과정을 거친다. 이번 책은 우연히도 내가 선별한 책이었다. 


사실 깊게 생각해 온 책은 아니었다. 내가 애용하는 이북 플랫폼인 리디북스에서 인문학 (이번달은 인문학을 공통 서적으로 추천하기로 했다.) 카테고리로 줄을 세웠고, 그 중에 여자 철학자의 책 중 읽고 싶은 것을 골랐다. 그렇게 어영부영 고른 책이 추첨(?)에 걸려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론은? 너무 좋은 어영부영 선택이었다.




본 책의 원제는 <두려움의 군주제: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이 책이 왜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번역이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책 후반부에야 풀렸다. 아마 나의 이 제목에 대한 이야기도 본 글의 후반부에 나올 예정이다.


우선 항상하듯 북마크한 부분을 인용할 예정이다. 우선 훑어봤는데 너무 많다;;; 그만큼 주옥같은 책이었단 뜻이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두려움에 굴복할 때 무너진다”라고 말했다.
두려움은 사실 지독한 자기애적 감정이다. 어떤 형태로 뿌리내리든 타인에 관한 모든 생각을 몰아낸다. 
특정인의 탓으로 돌리면 자아가 충족되면서 깊은 위안을 받는다. ‘나쁜 사람’을 설정해 비난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무력감 대신 통제감을 갖는다


"우리는 심각한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하고 이 벌은 고통스럽다는 점에 동의한다. 가끔은 징벌이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하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보복, 즉 응보적 정신으로 징벌을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비판한 태도이며 이는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섬뜩한 전략으로 이어진다. 이는 범죄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전략도 아니다. 더 나은 태도가 분명히 있다."

이는 단순한 상실과 역경에도 타인을 탓하며 ‘나쁜 사람’을 벌해야 자신의 상실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욕구로 드러나기도 한다.

혐오는 견고한 이해관계를 지키겠다는 남성들의 결심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성차별주의의 논리는 몹시 불합리하다. 1872년, 영국 의회에서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던 밀은14 성차별주의자들이 여성이 무능력하다고 판단하는 데 자신이 없을 거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들이 할 수 없다는 그 일을 여성들이 하지 못하도록 너무 열심히 막을 필요가 없다면서 말이다. “여성이 타고난 본성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없다.”"

"‘여성 혐오’의 어원을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증오’를 뜻하지만, 지금은 훨씬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만이 

정의했듯이 이는 여성들의 발을 묶어 놓으려는 행동 양식이다."

하지만 ‘지금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힘을 모아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말하는 것과, 지배 계급이 잘못되길 바라고 행복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타인의 인간성을 포용하면서 그들이 저질렀을지 모르는 잘못된 행동만을 반대해야 한다. 그래야 동료 시민들의 말과 행동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친구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과 비난, 보복을 통해서는 타인에게서 어떤 선함도 찾을 수 없다. 특히 요즘과 같은 소셜 미디어 세상에서는 건설적이지 않은 비난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가 너무 쉽다."


소셜 미디어는 복잡한 논쟁보다 무심코 내뱉는 짧은 말들을 조장한다
관심사는 오직 나, 나, 나뿐이다. 발달한 기술로 이미 짧아진 주의력 지속 시간은 (끊임없는 휴대전화 확인, 산만한 산책과 운전)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지금 당장 선언하라는 소셜 미디어의 조장 덕분에 더 짧아졌다.
나는 불편한 생각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가 확산되고, 교실을 고립시켜 학생들이 이미 갖고 있는 생각만 다루려는 욕구가 우려스럽다.


책의 중반 부분은 타인에 대한 응보적 사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좀 많은 반성을 했던 것 같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어떤 상대가 나에게 어떤 마음 (이 책에서 말하는 질투, 시기를 포함해) 줬든, 그게 부정적 감정이라면 반드시 상대도 그 이상의 고통을 겪기를 바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반드시 쟤는 이러이러이렇게 되어야해. 하는 등의 생각들. 사실 이건 좀 심각한 고백인데 나에게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철저하게 살아가는데 저렇게 해이하게 살다니.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해. 하는 생각들도. 굉장히; 안좋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해왔다... 

이 사고에 대해 책이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책의 원제에서 밝혔듯, 두려움은 자기애적 감정이며 타인에 대한 이해심을 몰아내 결국엔 다른 사람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한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군주'가 되어 행동하려 하고. 웃긴 게 그렇다고 내가 이런 응보적 사고가 독이 된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다. 

어떻게 알았냐면, 그러니까 내가 이 챕터를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미러링과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관점 변화였다.


메르스 갤러리가 유행할 즈음 나는 미러링이 참 재밌었다. 된장녀, 김치녀 같은 어떤 프레이밍에 항상 시달리기만 하다 상대에게 그런 프레임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다. 실제로 미러링의 많은 전략이 먹히기도 했다. 성적 의미를 함유해 여성에게 수치심을 줬던 두자리 숫자의 사용은 정 반대의 의미가 된 덕에 싹 사라져 버렸고, 어린 여성들이 김치녀, 된장녀에 맞서 (적어도 그런식의 음식에 비유하지 않은) 어떤 반격의 프레임을 무기로 쥘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사고들은 점점 혐오로 번져 미소지니의 그 여성 '혐오'와는 다른 hatred의 남성 혐오가 생기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때의 나는... 남자 창작가가 만든 모든 것들이 싫었고 (지금도 대부분 싫어한다.) 심지어 여성이 주연인,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남자 창작가조차 싫었다. 남자가 말하는 건 무가치 했고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사이다 서사'의 주연이 되어 남자를 망신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무슨 계기였을까.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세상의 반 이상이 나와 다른 성별인데. 오로지 사람들이 원하는 생물학적 지정 여성 성별을 지닌 사람만 올바른 생각을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나부터도 누가 나한테 너 틀렸어. 다짜고짜 따지면 기분부터 나쁘다. 아무리 한국의 'kibun' 정서가 유별나다지만, 사람이라면 누가 기분에 휩쓸리지 않을까. 내가 아주 틀린 것에 대해 그 사안보다 기분을 중시하겠단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저 사람을 '고칠' 생각이라면 그 사람의 반발심을 유도할 이유는 또 없지 않을까. 그럼 우리가 그 많은 반을 어르고 달래야 한단 말이냐. 하면 거기에 대해 나도 해줄말은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꾸준히 예를 들어오는 마틴 루서 킹 조차 오만했던 백인을 '어르고 달래'왔던 사람이란 건 알았음 좋겠다. 


그때부터 좀 많은 글들이 달라보였다. 나는 트위터를 주 sns 매체로 사용하는데, 트위터의 많은 발언이 이런식으로 넘어간다. 모 아니면 도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화제는 '도'였다. 또, 어떤 화제에 대한 해결보다는 그 화제에 대해 불을 지피고, 그게 커지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워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대다수라기 보단 아마 이런 글들이 주로 화제가 되어 '리트윗'이 돼 실제 사람들이 즐기는 것에 비해 확대되어 보이는 걸 테다.) 나는 남자의 어떤 나쁜 행동에 대해 (범죄가 아닌 이상) 관심을 주지 말자는 파인데, 그렇게 관심을 얻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조차 주지 않으면 알아서 사그라들 호기심을 이 사람을 망신 주기 위해 자꾸만 불을 지피는 행위가 대체 어떤 도움이 될 건지. 게다가 다른 이야기들도 그렇다. 재테크를 예시로 들면, 나와 맞지 않은 건 무시하고 나와 맞는 것만 취하면 된다. 모두가 상황과 벌이가 다른데 같은 방법을 취할 순 없다. 하지만 sns식 해결방법은 나와 맞지 않은 어떤 방법을 '인용'하고 과격한 발언을 하며 나와 함께 이 사람을 비난할 사람을 찾는다. 그러면 어떤 중도적 의견도 부각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채 비난만 남는다. 이 해법이 정말 필요했을 사람에게는 왜곡된 정보만 전달 된다. 

길게 길게 썼지만, 결국은 그거다. 나는 그러한 분노를 풀어내는 '응보적 사고'에 지친 셈이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을 '인용'과 '리트윗'으로 처벌하겠다는 행동들. 그리고 전혀 '이행 분노'로 넘어가지 않아 해결되지 않는 사안들에 넌덜머리가 난 거였다. 나는 그 후로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한 미러링을 하지 않게 됐고 (물론 하던 건 하고.. 심한 건 안한다는 것임.) 단순 조롱보다는 어떤 방법을 찾고 싶어졌다. 


이 책은 사실 해답을 위한 책은 아니었다. 해법이라고 적힌 마지막 장은 사실 화합에 대한 두루뭉술한 말들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책의 중간 챕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장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게 사실 책의 목적이 아니었나 싶다. 아주 자세히 우리의 어떤 심리와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르고 달래며) 그런 방법은 이러한 이유에서 옳지 않다고 한다. 다행히, 아주 운이 좋게도 이 부분에서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마지막 장이 무용지물인 이상 내가 깨달아야 하는 점으로 남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위에도 인용했지만)  "나는 불편한 생각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가 확산되고, 교실을 고립시켜 학생들이 이미 갖고 있는 생각만 다루려는 욕구가 우려스럽다."  이런 구절이 있다. 그리고 저자가 만난 어떤 학생의 이야기가 있다. (사형 집행을 찬성하는 입장으로서 반대의 입장에 서 토론하게 된 경험이 아주 당황스러웠지만 이것이 정치의 길로 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타인의 입장에 서서, 내가 듣고 싶지 않은 타인의 합리화 마저 들어보는 그 길. 그리고 그 사람의 어떤 악의적 행동 뒤에도 인간의 선함이 있을 거라는 희망. 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아마 책의 제목인 <타인에 대한 연민>은 역자가 이런 면에서 붙인 제목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두루뭉술하게 끝나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저자가 한 구절로 정리해 붙여 놓은. 원제가 우리의 행동 원인을 표현했다면 역제는 그런 행동에 대한 해법을 나타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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