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chola Feb 16. 2024

요즘 즐겨신는 신발

몇 개월 전부터 내게는 즐겨 신는 신발이 생겼다. 인터넷 쇼핑 중에 우연히 하나 장만하여 신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편리하고 발에도 꼭 맞는 데다 저렴하기까지 하여 애착 신발이 되어 버렸다. 

‘고무신’ 

이름부터가 정겹게 들린다.

정겹게 들리는 데는 옛 기억이나 추억에 대해 무의식부터 그렇게 자리 잡았을 터이다,

서너 달쯤 전에 한 사이트에서 고무신이 보이기에 엄마 것과 내 것 2켤레 남성용 디자인의 검정 고무신을 구매하였다. 잘 신고 있다. 아버지 것을 사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고무신이 싫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무신이 너무나도 신기 싫은 이유는 6.25 때 이미 초등학생 이었던 아버지는 그 어려운 시대에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어릴 때 학창시절 운동화가 너무도 신고 싶었지만 많은 형제들 때문에 장남만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고 나머지 형제. 자매들은 고무신만을 신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그것도 딸들은 흰 고무신인데 아들들은 검정고무신만 신고 다니셨다고. 

검정고무신이 낡아도 구멍이 나도 새신으로 바꾸지 못했고 조금 찢어지면 다른 종류의 재질을 (찢어진 곳에) 대서 꿰매서 신고 다니셨다고 한다. 바닥이 다 닳아서 뚫릴 정도가 되어야 (검정)고무신을 새로 가져 볼 수 있었다고 하셨다. 

겨울철에는 발이 시려도 검정고무신만을 신고 다니셨다고도 하셨다.(문장 길이를 늘리기)

중학교 3학년 때 한 켤레의 검정색 운동화를 할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고는 너무 나도 기뻐서 손에 쥐고 닳을까 맨발로 하교를 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집에 오면 운동화가 빨리 닳을까하여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학교에 갈 때 만 신으셨다고. 너무 나도 아껴서 신으셨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1년 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지긋지긋했던 검정 고무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엄마와 내가 신은 검정 고무신을 보시고는 껄껄대고 웃으시고는 “정말 옛날 생각난다.” 라고 말씀하셨다. 

난 마트에 갈 때에도 은행에 갈 때에도 미장원이나 동네병원에 갈 때도 신고 간다.

이런 대도시생활에서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거니와 내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흔하지 않은 모습인지라 신고 다닐 때 마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물어보곤 한다.

“어머, 이런 건 어디서 구매했나요?”  “ 편한가요?”  “얼마 해요”  “미끄러지지는 않나요?”  “겨울에도 괜찮아요?” “어떻게 이런 걸 신고 다닐 생각을 했어요?” 등 다양하다.

이런 내 모습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대해 내심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또 고무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으며 상이한 반응 결과에 나름 소소한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고무신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있다. 난 부모님의 바쁘신 일 때문에 부산에서 인천으로 보내져 초등학교 2학년 2학기를 할머니 댁에서 혼자 맡겨져 한 학기를 보낸 적이 있다. 

할머니 댁에서는 내가 첫 손자여서 사랑을 듬뿍 받았었고 원래 말을 잘 안 듣는데다가 말썽도 많이 부렸었다.

잦은 장난과 작은 사고들에도 ‘허허’ 웃으시던 나의 조부모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귀가하는데 앞집에 4학년 언니가 “인천은 생강엿이 너무 맛있어. 너 먹어봤어?” 라는 말과 “조금 후에 생강엿 파는 아저씨가 손수레를 끌로 오시는데 집에 아무 물건이나 가져오면 생강엿을 먹을 수 있어.”라는 꾐에 빠졌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헐레벌떡 와서는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엿으로 바꿀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신발장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할머니의 새 고무신을 본 순간 난 저거다 싶었다. 할머니의 하얀 꽃무늬가 그려진 새 고무신 한 짝을 가져다 엿으로 바꿔 먹었다. 할머니의 고무신과 바꿔진 엿을 그 언니와 동네 애들과 나눠먹었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생강엿의 맛은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해서 실망감이 컸다. 엿을 다 먹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제야 난 할머니 고무신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성당을 가시려는 할머니께서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 고무신 때문에 짜증을 내시며 미사시간도 많이 늦어지셔서 그냥 다른 신을 신고 가셨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 오셔서는 내게 물으셨고 나의 엿 바꿔 먹었다는 말에 할머니의 눈은 흰자위로 가득해 지셔서 몹시 화를 내시며 초등학교 2학년인 나를 등짝과 엉덩이를 때리시며 초록색 대문 밖으로 쫓아내셨다.

당시 난 너무 억울했다. 그까짓 고무신 한 짝을 잃었다고 그렇게 예뻐하시던 손녀에게 이렇게 까지 하시다니.

2년 전 2021년 3월에 97세 나이로 할머니는 선종하셨다. 난 늘 외국에서 살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잘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그 때 아끼던 예쁜 고무신은 고사하고 흰 고무신 한번 사다드리지 못한 마음에 아직도 후회스럽고 죄송스럽다.     

고무신을 언제까지 신고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편하고 나름 습관이 되어 벗어던질 생각은 없다. 남들의 관심에 미소 짓게 되긴 하지만 관심을 받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나만의 멋이고 개성이며 남들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나의 생활의 일부분일 뿐이고 내게 있어 고무신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나만의 힐링 인 셈이다.

오늘 고무신을 깨끗이 세탁하고 옥상 햇빛이 잘 드는 곳에 걸쳐놓으니 더욱 예뻐 보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