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또 무언가를 배워 오면서 살짝 우려했던 점이 있다. 내가 이렇게 접하는 모든 지식과 정보와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마음은 소위 논픽션으로 분류되는 책, 특히 서구의 저명한 학자나 그에 준하는 유명인이 방대한 참고문헌과 함께 써낸 책을 읽을 때 가장 크게 작동했다. 물론 '이렇게 저명한 인물이'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는 점에서 책의 내용을 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만도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저명한 인물들 간의 견해차가 얼마나 많고 또 극심한지, 그리고 한때는 통설로 받아들여지던 주장이 몇 년에서 몇십 년 후에 얼마나 제대로 뒤집어지곤 하는지 생각해보면 우려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게다가 간단한 보고서 한 편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참고문헌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선택적으로 골라오는 일이 얼마나 쉽고도 간편한지 알 것이니 제아무리 방대한 참고문헌이 따라오더라도 마음 편히 안심하기는 어렵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의 이야기일 때, 그렇게 '이 책의 내용을 내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버리면 어쩌지'에서 출발하는 의문은 더욱 강해졌다. 이 이야기가 머지않은 미래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고, 이미 현재에도 대립하는 학설이 숱하게 존재할 수도 있고(이 세상에서 얼마나 가치 없거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이 책으로 출판되는지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설령 책의 내용이 정보적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더라도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에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저자의 견해조차 완벽하다 하더라도 그걸 내 의견으로 100% 흡수해 버리는 건 역시 떨떠름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 아는 영역의 이야기일 때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나의 지식이랄 건 늘 보잘것없었고, 내가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도 그럴듯한 반박을 접하면 뒤집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모든 글을 읽으면서 자주 고민했고 걱정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걱정을 좀 내려놓게 됐다. 책에 인덱스를 붙이고 독서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만들어가던 시기와 비슷하게 걱정이 점차 옅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특정 단락에 대한 반박이나 반례를 쉽게 떠올리기도 하고, 다른 책의 내용을 끌어오기도 하면서 전형적인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알아차린 순간, 내가 그러고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 걱정이 무색해졌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를 결코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알아차림'의 순간을 몇 번 겪었고, 오늘 또 한 번 그랬기에 글감으로 삼아 본다. 그리고 수백, 수천 권의 책을 만나고 또 떠나보낸 후인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했던 그 걱정은 참으로 우습기도 했다. 내가 무슨 책을 한 번 보면 완벽하게 외워 버리는 카메라식 기억력의 소유자도 아니고, 어차피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그 책에 담긴 정보와 주장을 전적으로 내 것으로 흡수해버린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가정이었다. 물론 내 삶에서 나와 접점이 있었던 상당수의 책들이 내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이 저자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버리면 어쩌지?' 하는 고민은 애초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 고민을 어린 나의 가상하고 귀여운 고심으로 치부하더라도, 비판적 읽기는 여전히 어렵다. 수많은 책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대부분의 책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어서 읽는 거지만, 동시에 그 앎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알아가는 동시에 검증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가. 어릴 때부터 한국사를 배우면서도 '이 기록이 전부 타당하고 진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아이로서는 모든 것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쉽게 속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일지언정 나의 고유한 이야기는 달리 가져가고 싶어서, 내가 접한 것이 나의 총합이 아니도록 만들고 싶어서 오늘도 조금은 삐딱하게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