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과 2021년에는 심리학 책을 많이 찾아 읽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독서 기록을 남기던 시절이 아니라 정확히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국내외 작가들이 심리에 관해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닥치는 대로 읽곤 했던 건 분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책이자 그만큼 좋았던 책들로는 브레네 브라운의 《수치심 권하는 사회》, 안주연의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허지원의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정도가 있겠다.
하나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책들을 여럿 읽다 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내가 주로 읽은 심리학 책들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들에는 이런 게 있었다. 자존감, 완벽주의, 자기자비, 마음챙김, 회피, 예민, 번아웃... 그중 내가 새로이 알게 된 개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HSP였다. HSP는 highly sensitive person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매우 예민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개념이 학계 전반에서 인정받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HSP를 다룬 심리학 책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일본 학자들의 저서가 여럿 있었다.
HSP 개념이 나에게 흥미로웠던 건, 나를 HSP로 정의함으로써 나의 어떠한 면들이 아주 잘 설명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예민한 사람이야' 하고 말하고 다니는 건 어딘가 쑥스러운 구석, 아니 그걸 넘어 괜히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정말로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이 예민하다고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타인에 비해 분명히 예민한 면모를 여럿 갖고 있었고, HSP란 개념을 만났을 때 그 궁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으나, 한편으로 이 개념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려웠다.
스스로를 HSP라는 범주에 집어넣는 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ADHD 진단을 받는 것처럼 전문가의 권위를 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에게 까칠함에 대한 합리화를 제공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시 내가 읽어본 HSP 관련 도서들은 그런 사람들의 특성을 기술하거나 사례를 제시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케이, 내가 HSP라고 치자.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했을 때 나에게 속시원한 답은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내향적이고 내성적이면서 예민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런 책들이 충분히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외향적이고 외성적인 면모 또한 갖고 있었기에 그들이 제시하는 해답이 불만족스러웠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HSP는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개념 중 하나로 남았다. 여전히 '나는 예민한 축에 속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관련 도서들을 찾아볼 필요성을 그리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는 방향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최근 오랜만에 HSP를 다룬 책을 한 권 읽었다. 최재훈의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다. 큰 기대 없이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었는데, 오늘 저녁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만큼 좋았다. 우선 사례 나열이 많지 않아서 좋았고, 외향성이나 완벽주의 등 다른 개념들까지 다루고 있어 납득이 잘 되었고, 한국 정서에 잘 맞게 쓰여서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으로 HSP 관련 일본 책들은 우리나라 정서와 동떨어진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나 예민한 사람이라고, 내가 이만큼 예민하다고 거듭 말하는 게 질릴 뿐만 아니라 나와 상대 누구에게나 좋을 게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글을 쓸 때는 종종, 혹은 그보다 자주 예민함을 다루게 된다. 그게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낮지 않은 수준의 HSP에 해당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완벽주의와 외향성 등이 섞여 있어 전형적인 HSP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처음 HSP 개념을 알게 된 이후로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이 HSP로서의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생존(혹은 생활) 방향성에 부합함을 실감했다. 이게 가장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나, 나답게 잘 살고 있구나.
HSP와 예민함에 관해서라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기에, 아예 하나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글을 연재해도 될 정도다. 키워드를 잡고 풀어나갈 이야기가 벌써 무궁무진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이야기가 비슷한 이들에게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줄 수도 있는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유난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하소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게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징징거리는 소리가 되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솔직담백하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나 이래서 사는 게 너무 피로해ㅠㅠㅠ' 하는 징징거림과 하소연의 연속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러니 공개적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들기 전까지는 일기에 실컷 쓸 생각이다. 다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HSP 개념을 바라보는 나의 변화는 꼭 여기에 남겨두고 싶었다. 2020년과 2021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3~4년 후의 나는 여전히 HSP인가 싶을 정도로 예민한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너보다는 정말 잘 지내고 있다고. 꼭 네가 그 성장의 즐거움을 알아줬으면, 직접 느껴줬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아마 n년 후의 나도 지금의 나에게 비슷한 말을 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