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슬픈 역사

비운의 마르가리타

by 마라곤


현재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2014- )는 펠리페 5세(재위: 1683-1746)의 직계 후손으로,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펠리페 4세((1605-1665)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후손이 아니다. 그러니까 프랑스 가문이 스페인의 왕가를 이어받아 왔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는 양적으로 세상을 호령한 스페인의 영광과 함께 왕가의 슬픈 역사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가문의 영속성과 영광을 위해 근친혼을 반복하면서 땅을 차지하고, 유지하면서 지독하게 종교에 집착하는 동안 가문은 스스로의 영역에 갇혀 버린 것이다. 현대에 와선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유럽의 흑사병이 고양이 때문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처럼, 그럴수록 더욱더 가문의 순수성을 고집하면서 남성 중심의 지배 이념을 더욱 공고히 하였음을 보면 (그 당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도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왕가의 슬픈 역사는 문학으로, 음악으로, 미술 작품으로 남아있어 드라마로서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기도 한다. 역사상 무수히 많은 왕조들이 비이성적인 판단과 아집, 폭력성을 드러내며 그 와중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례가 비일비재하겠지만, 스페인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그들 왕가의 비밀은 왠지 모를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과 왕녀 '마르가리타'에 대한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글쎄, 시작은 펠리페 1세의 아버지 막시밀리언 1세부터라고 할지 모르지만,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 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근친혼이 공고하게 지켜진 때문이겠다. 카를 5세(룩셈부르크 가문으로 보헤미안 출신의 최초 황제인 카를 4세를 이어 카를 5세라고 하며, 동시에 스페인 왕가로는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령과 에스파냐와 신대륙의 식민지까지 상속받고, 합수부르크 가문의 모든 영지를 받은 행운아였으니 세상에 그칠 것이 없었겠지만, 아울러 그 광대한 대륙을 지키기 위해선 가장 믿을 만한 가족과 친지에게 계속 왕위를 물려주는 방법을 택하였을 것이다.



근친혼에 의한 유전병으로 인해 턱이 비정상적으로 돌출하는 증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턱이 길어지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여 침을 흘리거나 말이 어눌해지는 등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인데 왕의 상태가 그렇다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일지 짐작이 간다.(왕가의 전속 화가는 가능하면 턱의 돌출을 가리거나 두드리지지 않게 그렸을 것이다.)


또한 유전병으로 인해 유아사망률도 높아서, 예를 들면 합스부르크가의 34명의 자손 중 10명은 한 살 전에 사망하고, 17명은 10살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자식을 낳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가능한 모든 근친과 서로서로 혼인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 당연하겠다. 이러한 유전병은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펠리페 4세(1605-1665)의 아들 카를로스 2세(1661-1700) 때 스페인 왕가는 대가 끊기고 누나 마르가리타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집가지만, 아이 없이 21살에 요절하면서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펠리페 4세는 아들의 유전병이 심각하여 처음부터 누나 마르가리타를 가까운 인척으로 시집보내서 사위로 하여금 가문을 잇게 하려고 하였다. 마르가리타의 어린 시절부터 초상화를 그려 외삼촌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드 1세에게 수시로 딸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냈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애절함과 왕녀의 깜찍한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어머니가 스페인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스페인 문화에 향수를 느끼고,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보러 미술관을 자주 찾았다는데, 라벨이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라는 첼로곡을 들으면 그 선율이 너무 아름답고도 애절함이 느껴져 자꾸만 스페인 마지막 왕조의 비운이 연상되곤 하는데, 이 또한 스페인 역사를 알고 나서 생기는 심각한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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