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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Apr 09. 2021

인디아나존스와 마추픽추… 기록이 없어 ‘불가사의’ 됐다

인디아나존스 주인공이 마추픽추 발견한 빙엄… 기록이 없어 불가사의

하이엄 빙엄 1911년 최초 발견… 예일대 5만점 유물 여전히 안돌려줘

최근엔 마추픽추 용도가 ‘왕의 휴양지’ 였다는 해석도 나와 의미 퇴색중

1912년 하이엄 빙엄과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함께 마추픽추를 찾아 찍은 사진.


잉카 문명의 대표 유적으로 꼽히는 마추픽추는 사실 별달리 ‘신비롭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용 연도는 1400~1500년대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으로 치면 조선시대(연산군~중종) 정도다. 막연히 ‘오래됐을 것’이란 예상을 배신하는 것이 마추픽추다. 마추픽추는 태양을 숭배하는 중남미 문명(아즈텍+마야)의 특성을 따라 태양신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신전이 유적 내 정중앙에 위치한다. 워낙 높은 산의 정상에 위치해있기에 유적에 오르기 전에는 밑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중도시’라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추픽추가 잉카 유적의 대표격으로 올라있지만 이 역시 고고학자들 사이에선 ‘대표성 부족’ 평가가 적지 않다. 마추픽추 거주 인구는 최대로 잡아봤자 2000명 안팎이다. 마추픽추가 ‘신비’라는 단어나 ‘불가사의’라는 단어와 매칭 되는 이유는 사실은 관련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인디아나존스 ‘빙엄?’= 마추픽추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엄 빙엄(Hiram Bingham)이다. 1911년 7월 빙엄은 당시 잉카 문명의 가장 중요한 도시 ‘빌카밤바(Vilcabamba)’를 찾고 있었다. 빙엄은 잉카의 수도에 막대한 양의 보물, 그 중에서도 특히 금을 찾고 있었는데 ‘황금의도시’ 엘도라도를 찾았던 유럽 모형을 따랐던 모험가 중 한명이 바로 빙엄이었다. 문제는 그가 찾은 마추픽추의 유적으로서의 성과가 실제보다 과장됐을 것이란 분석이 최근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빙엄이 마추픽추를 찾았으니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맞겠으나 그는 살아있을 때 다수의 역사학자들과 마추픽추가 빌카밤바가 맞다는 주장을 꺼내놓으면서 학계에서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었다.

하이엄 빙엄. 인디아나존스의 주인공 처럼 그는 실제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다. 싸움도 잘하고 도굴도 잘했다. 예일대는 훔쳐간 유물 5만점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빙엄의 ‘발견 성과’인 마추픽추가 사실은 별 것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일단은 마추픽추 발견 자체가 그리 큰 의미를 두기엔 모자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미를 침략했던 스페인 군대 역시 마추픽추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빙엄이 발견한 것도 인근에 살던 농부들이 알려준 정보 덕이었다. 말하자면 쿠스코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그곳에 마을이 건설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빙엄이 마추픽추의사진을 찍은 것 외에 그의 고고학적 업적은 보잘 것 없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 2015년 타임은 ‘빙엄이 마추픽추에 대해 무엇을 잘못 알았나’는 제목의 글에서 “마추픽추는 잉카의 대표 유적지가 아니다. 그곳은 다만 왕이 여름을 나기 위해 시간을 보냈던 휴양지에 불과하다”고 썼다.

빙엄이 살아생전 확신에 차서 떠들었던 ‘발견 성과’도 과장됐다는 비난과 함께 돌아온다. 빙엄은 마추픽추에 대해 “마추픽추는 스페인군이 남미를 정복한 이후 발견된 남미 최대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폐허 유적이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 학계에선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역추정한 결과 최대 2000명 이상 거주가 불가능 했을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안락한 삶을 위해선 1000명 미만의 거주가 가능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최초 발견자가 빙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페인과 독일 기술자 J. M. 폰 하셀은 자신들이 이미 마추픽추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엔 살짝 ‘별 것 아닌 발견’으로 간주되는 마추픽추가 ‘죽기전 가봐야 할 곳’ 10가지 중 한 곳에 항상 꼽히는 이유는 인디아나존스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빙엄은 처음 마추픽추를 발견한 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지원을 받아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세차례에 걸쳐 마추픽추를 다시 방문했다. 덕분에 빙엄은 일약 스타가 됐다. 후에 빙엄을 모델로 ‘인디아나존스’가 만들어진 것 역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그곳에 ‘신비의 유적’ 마추픽추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 사람이 스티븐슨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최초발명자(트레비식)는 기관차를 석탄 운반에 사용했던 데 반해, 스티븐슨은 여객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석탄은 말을 못하지만, 사람은 말을 할 수 있었기에 스티븐슨이 유명세를 탄 것이다. 빙엄이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등에 업고 대대적인 홍보를 한 덕에 오늘날에도 빙엄의 업적으로 마추픽추가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아구에스깔린데에서 마추픽추까지 올라가는 구불구불 차량 도로의 명칭도 ‘빙엄 로드’다.

문제는 빙엄이 추가로 마추픽추를 있었던 세차례의 방문에서 5만점이 넘는 고대유물들이 모조리 미국으로 빼돌려 졌다는 점이다. 인디아나존스의 해리슨 포드의 원래 모델은 사실상 ‘도굴꾼’이었던 셈이다. 페루 정부는 오늘날에도 미국측(정확히는 예일 대학교)에 유물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되돌려준 유물은 600여점에 불과하다.

▶기록이 없어 불가사의가 되다= 유적 마추픽추를 방문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당시 가이드는 마추픽추의 사용 용도에 대해 ‘귀족학교’였다는 설명을 했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곳에서 살 수 있었는데 어렸을 때 마추픽추로 올려보내진 아이들이 잉카족의 리더로 길러지는 과정에서 일종의 학교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사실 ‘귀족학교설’을 마추픽추의 이용 용도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학설로는 ‘왕의 휴양지’였다는 설도 있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란 ‘제단설’도 있다.

타임은 2015년 마추픽추가 '왕의 휴양지'였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게재했다. 요약하면 '마추픽추 별 것 아니다'는 주장이다.

하나의 유적에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문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남미에 소재했던 문명들의 공통점은 문자가 없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하나의 유적에 여러가지 해석들이 따라 붙는다. 사실 아즈텍이나 마야, 잉카 문명이 존재했던 시점은 비교적 근세다. 1500년대 정도로 추정되는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해가 1492년이었고, 한국으로치면 조선이 있었던 해다. 조선시대 유적을 우리는 ‘불가사의’라거나 ‘신비롭다’는 설명을 붙이지는 않는데, 이 차이는 결국은 기록 존재의 유무에서 나온다.

흔히 잉카 문명의 최대 불가사의에 대해 정교한 석축 쌓기 실력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막상 마추픽추는 돌을 쌓은 방법들이 다양하다. 물 샐 틈없이 위아래 돌을 딱 붙여 만든 정교한 석축벽이 있는 곳도 있고, 비교적 대충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벽들도 있다. 각 석축들이 만들어진 시대를 동위원소법으로 추정을 해본결과 각기 다른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동위원소법은 해당 돌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할 뿐이지, 그 돌을 사용했던 시기가 언제인지를 추정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까지 가는 ‘정글 트레킹’은 사실 빙엄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는 의미에서의 ‘순례길’에 해당한다. 빙엄은 쿠스코에서 마추픽추까지 6일동안이나 걸려 약 8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당시에도 아구에스깔린데 마을도 있었는데, 빙엄은 아구에스깔린데 숙소에서 묵은 다음 마추픽추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위대한 ‘조선왕조실록’= 남미의 역사를 공부하면 거대한 장벽을 만난다. 바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미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은 대부분 ‘스페인 침략’을 그 역사의 시작점으로 상정한다. 스페인이 남미에 오기 전에도 그곳엔 분명히 사람이 살았을테고, 역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나 기록되지 못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역사서의 관점은 유럽의 관점에서 기술된다. ‘정복’이란 단어와 ‘발견’이란 단어와 짝을 이루는 것은 ‘학살’과 ‘착취’였다. 남미 역사학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다시 문자 얘기로 되돌아가면, 잉카 제국에도 매듭으로 의미를 기록했던 ‘키푸’라는 이름의 띠문자, 또는 결승문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는 오늘날에도 해석되지 않고 있다. 해석이 된다 하더라도 숫자를 세는 것, 기상 변화나 별의 위치를 아는 것 정도 이외에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확인하는 데엔 ‘키푸’ 문자는 그다지 유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보인다.

이에 비해 한국의 조선왕조실록은 실로 대단한 기록물이다. 왕의 일상을 기록한 것을 넘어 서민들의 삶과 생활, 정치와 경제는 물론 역병이 돌았거나 혜성이 떨어졌거나 승냥이가 출몰했던 사안들도 모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주장할 때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가 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할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오늘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는 거대 기록물로 의미가 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국가의 역사 기록서로 모두 쌓으면 12층 높이에 이를만큼 거대한 규모다.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마라’는 태조의 얘기마저 실록에는 기록돼 있고, 후대의 왕이 실록을 고칠 경우 기존의 기록과 수정 기록을 모두 보존하는 치밀함도 조선왕조실록이 대단한 기록물인 이유중 하나다.


▶타임. 2015년 빙엄이 잘못 알았던 몇가지

https://time.com/3962462/machu-picchu-hiram-bingham/

▶미국, 정확히는 예일대는 훔쳐간 마추픽추 유물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https://plone.unige.ch/art-adr/cases-affaires/machu-picchu-collection-2013-peru-and-yale-university

▶위대한 조선왕조실록 (우산도를 검색하면 독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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