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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May 13. 2021

역대급 전리품 오벨리스크… 이스탄불에선 ‘찬밥’ 이유


이스탄불에서 만난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원산지는 이집트

뉴욕에도 런던에도 파리에도 하나씩... 지도자의 권능 상징

바티칸 시티 대성당 앞에도 오벨리스크... 워싱턴 기념비는 '짝퉁'

진짜 오벨리스크는 뉴욕 센트럴 파크에... 3천년 지나도 보존상태 '최상'



터키 이스탄불은 천년도시다. 유네스코는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오래된 도시인만큼 시대마다 이름도 달라졌다. ‘천년도시’의 이름은 비잔티움으로 비잔틴제국의 수도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이슬람 술탄에 의해 정복된 다음에는 이름이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으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터키 공화국 수립(1923년)이후다. 이스탄불이란 말의 의미는 ‘도시’라는 터키어에서 유래했다. 일반명사를 고유명사로 사용하는 데엔 그만큼 상징성이 크기 때문일테다.


이렇다할 도시 자체가 없었을 고대시절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도시’라고 하면 그냥 이스탄불이지 않았을까. ‘봉고’란 고유명사가 승합차를 대신하는 일반명사가 된 것도, 소니사가 만든 제품 ‘워크맨’이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의 대명사가 된 것 역시 그만큼 많이 팔렸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그 자체로 관광명소다. 아야소피아 대사원(성당이 아니다)과 술탄 메흐메트 사원(블루모스크가 아니다)이 있는 곳에서부터 중앙광장인 탁심 광장까지 걷기만해도 대부분의 이스탄불 명소를 만날 수 있을만큼 관광객 친화적인 도시가 바로 이스탄불이다.

터키 이스탄불 오벨리스크. 역대급 유적이지만 관광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조차 찍지 않았다. 큰 조형물인 탓에 멀리서도 잘 보인다. 오늘날엔 '만남의 광장' 역할을 충실히 한다.

▶‘노관심’ 오벨리스크= 이스탄불 구 시가지에서 가장 내 눈을 끈 조형물은 메흐메트 사원 광장에서 서쪽으로 300미터 정도 떨어진 히포드롬 광장에 위치한 오벨리스크였다. 관광을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행인들마저도 그 오벨리스크에 대해선 별달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무리의 관광객들이 오벨리스크 아래 모여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관광객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곳에서 관광객들을 다시 만나기로 한 무리였다. ‘누구 아직 안왔냐?’는 가이드의 말도 들렸다.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문양만 보더라도 이집트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거대 유적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오늘날엔 관광객들의 ‘만남의 장소’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관광객들마저 ‘노관심’이라 내가 확언하는 이유는 내가 본 그 어떤 관광객들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한 건설회사가 자사의 브랜드로 ‘오벨리스크’를 사용하고 있다. 브랜드 명을 정하는 것은 매우 세심한 작업인데 왜 하필 ‘오벨리스크’라는 긴 이름을 아파트 이름에 붙였을까.


사실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에만 있지 않다. 전 세계 이렇다할 큰 도시들마다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벨리스크다. 가장 유명한 오벨리스크는 워싱턴DC에 세워져 있는 오벨리스크인데 공식 이름은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인데, 이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만큼 그 높이도 세상에서 가장 크다. 이외에도 프랑스 파리에도, 바티칸 대성당의 중심에도, 런던과 뉴욕 이스라엘에도 하나씩 놓여져 있다. 이름을 들어 알만한 도시엔 오벨리스크 하나 갖추지 않은 도시들이 없다.


왼쪽부터 바티칸, 로마, 파리, 런던, 뉴욕, 이스탄불, 이스라엘, 네덜란드, 이집트에 세워져있는 오벨리스크

이스탄불에서 만난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이 세워지기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스탄불 오벨리스크의 이름은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인데, 제작 기원이 무려 기원전 3000년 이집트에서다. 이스탄불이 처음으로 도시로 지정돼 건립된 것은 기원전 7세기 가량으로 알려지는데, 이스탄불이 만들어지기 20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는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 앞에 세워져 있었던 것인데 로마 황제(콘스탄티누스2세)가 이집트 아스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오벨리스크를 옮겨왔고, 이스탄불로 다시 옮겨온 사람이 테오도시우스 1세다. 이 거대한 돌덩어리를 왜 그 머나먼 곳에서 이곳까지 옮겨오게 됐을까. 문화재 약탈의 역사는 고대로 올라간다. 거대한 돌덩어리인 이 오벨리스크의 원래 길이는 60미터에 무게는 800톤에 이르렀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를 세토막으로 잘랐고 이스탄불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잘려진 세 부문 가운데 가장 윗 도막이다.


이스탄불 오벨리스크는 그러나 그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 내에선 그다지 관광 명소로 꼽히지 않는다. 이유는 워낙 이스탄불에 다른 볼거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술탄 메흐메트 사원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첨탑(미나렛)이 6개인 사원이다. 이슬람 사원은 개인이 지은 사원(첨탑 1개), 지방자치단체가 지은 사원(첨탑2개) 등으로 첨탑 수가 권위를 상징한다. 술탄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 미나렛을 메카에 있는 사원의 미나렛 수와 같은 6개로 만들자, 후일 메카 사원이 첨탑 수를 9개롤 늘리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아야 소피아 대사원과 관련해선 내가 학창 시절때엔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배웠었고, 이후엔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공식 명칭이 됐다가 현재는 ‘아야 소피아 대사원’이 맞는 표기다. 이슬람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현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이 박물관 대신 ‘모스크(사원)’로 명칭을 바꿨기 때문이다. 또 이스탄불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적 ‘술탄 아흐메트 사원’을 ‘블루모스크’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정식 이름을 놔두고 서구인들 입맛에 맞게 ‘블루모스크’라고 부른 다음 이것이 우리에게 마치 별명이나 되는 듯이 알려진 것이다.


명칭은 최소한 해당 국가 또는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야 소피아 성당이 아니라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블루모스크가 아니라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로 부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여러 방법중 하나. 상상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170미터)인 워싱턴 기념비. 그러나 이 오벨리스크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오벨리스크는 사실상 '모조품'이다.

▶힘센 도시들에 하나씩… 글로벌 유적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돌탑이다. 가장 작은 것이 30미터 안팎이고 가장 큰 오벨리스크인 워싱턴 기념비의 높이는 170미터에 이른다. 이상하리만치 큰 워싱턴 기념비는 그러나 이집트산이 아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건축가 로버트 밀스가 1848년에 건설을 시작했는데 남북전쟁 등으로 인해 1885년이 돼서야 완공됐다. 사실 워싱턴 기념비는 정통 오벨리스크라고 보긴 어렵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설치된 오벨리스크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일단 오벨리스크는 전체가 단일 돌덩어리로 제작돼야 하고,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붉은 화강암이 사용돼야 한다. 그러나 워싱턴 기념비는 여러조각으로 나누어진 돌덩어리를 쌓아 올린 것이고 게다가 제작 연도에 따라 돌의 색깔도 바뀌었다. 이집트산 오벨리스크가 정통 오벨리스크라고 한다면 워싱턴에 있는 것은 사실 유럽 도시들에 있는 오벨리스크가 부러워 따라 만든 모작품인 셈이다. 기형적으로 큰 그 크기부터가 사실은 ‘내가 짝퉁’임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가장 유명한 오벨리스크는 그래도 역시 바티칸 대성당 앞에 있는 대형광장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오벨리스크다. 교황청은 이 오벨리스크 정상부에 십자가를 추가했는데, 이는 이집트 문명을 가톨릭의 권능으로 누르고 있음을 형상화 한다. ‘내가 짱’이라는 표식으로 십자가를 오벨리스크 가장 정상부에 추가한 셈이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져 있는 오벨리스크나 영국 런던에 소재한 오벨리스크 역시 이집트에서 훔쳐간 대표적 유적 도굴에 해당된다.

이탈리아에 있는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의 최초 목적은 이집트의 태양신 ‘라’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집트의 사원 입구에는 두개가 한쌍인 오벨리스크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태양신 라를 기념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터라 정상부엔 금이나 금은 도금으로 피라미드 형태를 만들어 올려 첫 아침 태양의 빛을 반사할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슬픈 것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오벨리스크는 거의 대부분이 문명국들이 훔쳐갔다는 점이다.


이집트산 정통 오벨리스크가 남아있는 것은 현재까지 모두 28기인데, 이 가운데 6개만이 이집트에 남아있다. 나머지는 전리품으로 또는 도굴로, 또 아주 가끔은 선물로 특정 국가나 정권에 이양됐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오벨리스크를 사용해 지구의 반지름을 처음 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에라스토스테네스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날에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오벨리스크와, 이집트의 아스완(구 시에네) 도시의 우물에 햇빛이 비칠 때의 시각과 각도를 계산해 지구의 둘레가 약 4만6000킬로미터일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단 이는 현재의 실측값(4만77킬로미터)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이는 에라스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와 아스완이 같은 경도에 있다’는 가정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지구 둘레 측정 방법은 사실상 완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니들로 칭해지는 오벨리스크가 188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뉴욕 센트럴 파크로 옮겨지고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오벨리스크가 각 도시들이 탐냈던 원인은 여러가지다. 일단 만들기가 무지막지하게 어렵다. 오벨리스크의 재질은 이집트산 화강암인데 화강암의 굳기는 6.5에 이른다. 굳기를 나타내는 경도(Mohs scale)는 가장 무른 활석을 1로, 가장 단단한 금강석을 10으로 규정해 측정하는데 화강암의 굳기는 유리(5.5)보다도 단단하다. 화강암을 암석덩어리에서 덜어내려고 하면 6.5보다 경도가 높은 재질의 기구로 깎아야 하는데 기원전 3000년엔 사실상 화강암보다 단단한 도구는 없었다. 이집트인들이 철을 녹이는 기술을 확보한 것은 기원전 600년이다. 역사학자 고든(Gordon)은 “무한한 인간의 노력”으로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뉴욕 센트럴파크 소재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가 기원전 3500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문 대부분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 역시 무지막지하게 깍기 어려운 화강암을 깨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 오벨리스크를 과거엔 어떻게 세울 수 있었을까. 유력한 설은 양측에 흙더미를 쌓아 이를 조금씩 끌어올리고 흙을 쌓는 방식으로 잡아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벨리스크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이집트인들은 오벨리스크를 히브리어 표기로 ‘모놀리틱(monolithic)’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하나의 돌’을 의미했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의 대표적 사례는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놓여있는 오벨리스크다. 이 것의 제작 시점은 기원전 3300년 전이다.


줄잡아 1천톤 가량이나 되는 하나의 돌덩어리를 어떻게 옮길 수 있었는지도 관심거리다. 오벨리스크가 세계 각지로 흩어진 시점은 15세기 경으로 이 당시 미켈란젤로는 과학자이자 수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에게도 ‘수송 방법’에 대해 문의가 들어왔는데, 미켈란젤로가 오벨리스크 수송에 대해 “부서지면 어떻게 하겠냐”며 일언지하에 수송 담당을 하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완성의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의 소재는 화강암이다. 유리(경도 5.5)보다 더 단단한 화강암을 덜어내기 위해선 '무한한 인간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 역사학자는 설명했다.


▶오벨리스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7가지 사실


https://www.mentalfloss.com/article/73935/7-fascinating-facts-about-obelis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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