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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May 15. 2021

아타튀르크의 나라 터키

내가 꼽은 가장 매력적인 도시 원톱 ‘이스탄불’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세속주의가 미덕인 터키

아타튀르크의 국가... 에르도안의 '친이슬람주의' 걱정

독립 전쟁에서 이겨 '로잔조약'의 주인공 아타튀르크


이스탄불 상가에 걸려있는 조명.

터키는 유럽일까 아시아일까. 정답은 경계선에 있다이다. 터키 최대도시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보스포러스 해협의 양쪽을 모두 점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럽의 끝’이자 ‘아시아의 시작’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론 ‘길목’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해왔는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지역이 터키인만큼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찬란한 영화를 누려왔던 곳 역시 터키다.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투스크의 영화 역시 길목을 가진자가 누린 특권이었다. 다만 최근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의 역할만을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행보들이 많아 터키의 미래가 밝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터키의 국가적 숙원사업은 유럽회원국의 일원이 되는 것인데 1960년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터키는 유럽연합의 준회원국에 머물러 있다. 유럽의 변방으로 취급 받는 이유 역시 명확하다. 터키가 유럽의 변방으로 여겨지는 이슬람 국가라는 점 외에도,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후 사형제 부활·이슬람 근본주의 회귀 등이 원인으로 지목받는다. 터키는 1차세계 대전 이후 뒤늦게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측에 줄을 잘못 서면서 패전국이 됐는데, 이후 세브르 조약으로 국토가 반토막이 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세브르 조약의 비준을 반대하고 전쟁을 일으켜 오늘날 터키 영토 상당부분을 복권한 사람이 터키 구국의 영웅 아타튀르크(무스타파 케말)인데, 오늘날 에르도안 대통령이 걷는 길은 아타튀르크의 행보와는 정반대다. 개인이든 국가든 줄을 잘 서야 하는데, 1차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면서 패전국이 됐던 오류를 오늘날 에르도안 대통령이 반복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상황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슬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데, 이는 세속주의(탈종교주의)를 내세운 아타튀르크와는 방향이 정 반대다. 터키의 숙원 사업인 ‘유럽연합(EU)’ 가입 역시, 교과서에서 진화론 기술을 삭제하고 사형제를 부활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이면서 점점 더 터키의 EU가입은 점점 더 요원해 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장 매력적인 도시 ‘원톱’은 이스탄불= 터키는 그 광대한 크기(한반도의 3.5배)의 땅덩이만큼이나 둘러볼 곳이 어마무지하게 많은 국가다. 특히 외침이 많고 땅의 주인 역시 여러번 바뀌게 되면서 문화가 섞이고 사람도 융화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없는 것이 없는 국제도시의 면모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터키 중앙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고원엔 기구 관광으로 유명한 카파도키아가 있고, 남부의 안탈리아는 지중해의 풍광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대표적 관광도시다. 지중해를 따라 줄줄이 들어선 도시 페티예, 쿠샤다스, 이즈미르는 도시가 아예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까지 느껴질만큼 웅장함이 가득하다.


그래도 역시 터키 최고의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세계에서 그 어떤 도시도 이스탄불만큼 볼거리와 탈거리, 먹을거리와 구경거리가 많은 도시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의 시대엔 콘스탄티노플로, 이슬람의 시대엔 이스탄불로 장장 1800년 동안이나 두 거대 종교의 중심이었던 곳이 바로 이곳 이스탄불이다. 교통, 상업, 무역과 금융업의 중심이자 정치·문화·종교의 중심이 이스탄불이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유일한 해상통로인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하루 수천대의 배가 오간다.


아랍인들 유리 가공 기술의 결정체인 형형색색의 조명들은 이스탄불의 밤거리를 비추고, 물담배를 피는 관광객들은 비스듬한 쿠션에 몸을 기댄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쳐다본다. 길을 걷다 배가 고프면 우리돈으로 200원이면 사먹을 수 있는 터키산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 되고, 갈라타 다리에서 고등어를 잡는 사람들을 하루종일 쳐다만 봐도 그 재미가 쏠쏠하다. 내친 걸음 이스탄불 정치의 중심 탁심광장까지 걷다보면 도보거리 중앙을 가로지르는 2량짜리 전차를 만날 수도 있고, 갈라타 탑 인근엔 세계 각지에서 온 악기들 가운데 한국산 통기타를 만날 기회도 있다.


여타 무슬림 국가들과는 달리 터키 국민들은 하루에 예배를 한번만 보는데, 이는 세속주의 보다 정확히는 탈이슬람주의를 표방했던 아타튀르크의 강도높은 개혁의 결과물이다. 이스탄불에만 3000개나 있다는 이슬람 모스크의 미나레트(첨탑)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소리(자미)는 ‘오늘도 하루가 다갔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리고, 시간이 많을 경우 보스포러스 해협을 잇는 보스포러스 대교를 걸어서 걷는 것만도 꽤나 큰 즐거움을 준다. 다녀봤던 도시들 가운데 ‘원톱’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스탄불을 꼽을 생각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이스탄불에서 묵었던 숙소의 아침 메뉴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컨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책을 쓴다면 ‘이스탄불의 아침엔 베이컨이 없다’는 제목으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이스탄불에 가면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는 원픽 음식중엔 ‘터키시 딜라이트’가 있는데, 너무 달다. 다만 그 과도한 당도 덕분에 터키시 딜라이트는 썩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가끔 친구들이 내 집을 방문하면 하나씩 꺼내서 준다. 내가 터키를 다녀온지는 6년이 지났다.


터키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란 뜻이다.


▶하필 독일과 한편을… 오스만의 몰락과 아타튀르크= 터키로 들어가는 관문인 이스탄불의 공항 이름은 아타튀르크 공항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은 2019년 4월 새롭게 생긴 ‘이스탄불 신공항’에 자리를 넘겨줬는데, 새 공항의 크기는 기존 공항 대비 7배나 커졌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의 잇점을 고려, 세계 최고의 거점 공항이 되겠다는 취지로 ‘이스탄불 신공항’을 건설했다.


터키 최고의 영웅은 역시 아타튀르크다. 국부라고도 불리는 그는 오늘날 터키의 거의 대부분의 정치·문화·사회의 기반을 만들었고 터키인들 상당수가 그를 ‘국부’로 칭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빵을 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에도 터키인을 만나 “아타튀르크!”를 외치면 모두다 “아타튀르크!!”를 연호하며 기쁘게 받아준다. 사실 터키의 근대사를 얘기할 때 아타튀르크를 빼면 이야기 할 것이 별로 없다. 현직 대통령인 에르도안이 집권하게 된 것도 사실은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반기류에 힘입은 바 크다.


잘 나가던 오스만 투르크가 사실상 멸망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줄을 잘못 서서다. 아타튀르크라는 불세출의 터키 영웅이 탄생한 것 역시 따지고 보면 1차 세계대전에서 멸망해버린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 역시 터키의 영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한 것은 순전히 독일 편에 섰기 때문이다. 별달리 득될 바도 없는 1차 대전 말기에 독일편을 들며 뛰어들었고, 오스만 투르크는 ‘패전국’이 됐다. 이때 그리스에게 빼앗겨 버린 해상 영토는 여전히 그리스로부터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터키 서남부 바다의 섬들의 지배권을 죄다 그리스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오스만 멸망시 그리스에 땅을 넘겨줬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 멸망의 시작은 1914년 8월 2일 오스만(메흐메트 5세 술탄) 제국과 독일(빌헬름 2세) 제국의 비밀동맹협정을 맺으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발발) 당시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영국·러시아·프랑스 3국과, 독일-이태리-오스트리아 3국이 싸우는 세계적 전쟁에 참가치 않겠다고 한 것이다. 중립국 선언 판단은 꽤 괜찮은 판단이었다. 그런데 중립국을 선언한 오스만이 독일과는 뒤에서 ‘비밀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3개월 가량 이어지던 두 제국(독-오)의 비밀은 독일 군함이 러시아를 치기 위해 이스탄불 마르마라해협을 지나는 것이 확인되면서 탄로가 났다. 중립국이었던 오스만이 차지하고 있던 마르마라해협은 전쟁중인 국가의 군함이 지나가게 놔둬선 안됐다. 그런데 그렇게 마르마래 해협을 지나간 2척의 독일 군함이 흑해로 나가서 러시아 항구를 폭격하자, 러시아는 1914년 11월 오스만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직전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발칸전쟁에서도 대패한 오스만 제국은 이미 경제적으로 빈사상태였는데 여기에 또다시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되면서 제국 멸망은 물론이고 국토가 4분의 1 가량으로 축소 돼버렸다.



세브르 조약 이후 터키의 영토. 중앙 연노랑색 부분만이 터키 땅이다. 아타튀르크는 이후 전쟁에서 이겨 오늘날의 터키 영토 대부분을 확정하는 '로잔조약'을 체결했다.


오스만의 몰락이자 터키의 몰락은 두번의 패전 조약 체결 때문이었는데, 첫번째가 무드로스 조약 두번째가 세브르 조약이다. 무드로스 조약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0월 체결됐는데, 동서남 세 방향에서 중앙을 향해 쪼그라든 형태로 국토가 찌그러지게 됐다. 1차 세계대전에서 잃어버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예멘·시리아는 물론 보스포러스 해협, 이스탄불, 조지아 서남부인 바툼 등이다. 지금 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에 의해 터키땅은 산산조각이 났다. 두번째 조약인 세브르 조약은 1920년 8월 프랑스 세브르에서 열린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이 체결한 조약인데,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아타튀르크다.


1차 세계대전에서 별달리 얻은 것도 없이 다만 줄 한번 잘못 선 죄로 패전국이 돼버리면서 국토 대부분을 연합국측에 내주게 됐다는 국민들의 분노가 아타튀르크(무스타파 케말)의 한몸에 투영되면서 일약 구원자가 된 것이다. 원래 군인이었던 케말 파샤의 시작은 사실상 ‘반란’에 해당된다. 연합군의 점령 하에 있던 이스탄불 정부를 인정치 않으면서, 케말 파샤는 앙카라를 수도로 한 앙카라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의 최대 업적은 이후 터키의 3대 도시가 된 이즈미르에서 그리스를 격퇴한 것이다.


이후 전쟁 장기화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과도하게 집어삼켰던 터키 땅 대부분을 뱉어내고, 그리스 역시 너무 많이 집어삼킴 터키 땅을 토해내는 것을 골자로 한 ‘로잔 조약’을 다시 체결하면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의 모습이 처음으로 확정된 것이 바로 전쟁신 아타튀르크의 업적이다. 통상 전쟁 영웅은 내치엔 약하기 마련이었는데, 20대 청년때부터 이미 정치인 수업을 받는 아타튀르크는 진보적 계몽군주가 돼 탈이슬람주의를 표방한 각종 정책을 펴 오늘날에도 터키의 국부로 칭송받는다.


아타튀르크는 칼리프제를 폐지했고, 오스만 가문인사들을 추방했으며, 종교관청과 율법을 폐지하고 터번 사용 금지, 일부다처제 폐지 등 개혁 작업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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