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과거를 잊은 듯 했다. 적어도 내가 베트남에 가보기 전에는 그랬다. 주지하듯 베트남은 미국과 1960년대 대규모 전쟁을 치렀다. 후에 미국의 자작극으로 드러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일으킨 베트남전쟁에서 사망한 베트남인 수는 수백만명이다. 미국은 베트남인 1인당 200킬로그람에 이르는 폭탄을 투하했다. 옐로우에이전트로 알려진 고엽제를 베트남 상공에 뿌려 숲을 말려버리고 비인도적 살상무기 네이팜탄으로 베트남을 불살라버린 것이 미국이다. 그러나 오늘날 베트남인 가운데 미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는 비율은 84%에 이른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베트남에 입항할만큼 양국의 관계는 돈독하다. 수백년간 이어진 베트남 내 반중국 감정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중국보다 미국이 낫다’가 아니라 미국과의 상호 호혜 관계에 국운을 걸었다고 봐야 할 정도다. 그들 베트남인들은 정말 과거를 잊어버린 것일까.
▶하노이 전쟁·역사 기념관= 베트남에서 가장 ‘베트남적 요소’들을 확인하려면 하노이 시내 정중앙에 위치한 베트남 전쟁·역사기념관에 가야 한다. 이 건물은 4층 높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 이 기념관 외벽에는 가로세로 10미터 크기의 대형 걸개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사진은 미군의 공습으로 잎이 모두 싸그리 말라버린 숲을 배경으로 깡마른 어린아이 7명이 서있는 사진이었다. 그 흑백 사진은 ‘미군이 이렇게 우리 국토를 말려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건물 밖에는 미군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재미 있는 것은 그 무기들 대부분은 베트남 군인들, 소위 베트콩들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이란 점이다. 탱크와 전투기, 폭격기, 대형 폭탄들이 전쟁 기념관 외부에 전시돼 있다. 자국의 전쟁·역사 기념관에 적국이었던 나라의 무기들을 다량 전시한 것은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상징한다. 실제로 미군은 7년간이나 이어졌던 장기간의 전쟁 베트남전에서 패했다. 전쟁이 치러진 장소가 베트남이었기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본 측은 베트남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어찌됐든 베트남 입장에선 승리다. 미군이 빠져나간 다음해인 1974년 북베트남군은 사이공(현 호치민시)을 함락시켜 남북을 통일 시켰다.
기념관의 외관은 승전의 기념(노획물)과 국토의 유린(걸개그림)이라는 모순되는 장면이 공존했다. 기념관 내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그들이 입었던 피해를 드러내는 사진 및 전시물들로 도배가 돼 있었다. 끔찍한 장면들도 고스란히 기념관에 박제됐다. 고엽제 피해를 입은 사진, 네이팜탄을 맞아 뭉개져버린 얼굴의 소년, 팔다리가 없는 또는 목이 부어있는 기형아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고엽제는 인체에 침투해 유전정보를 교란시키는 물질로도 알려져 있는데, 고엽제를 맞은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기형아를 출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외에도 베트남 사람의 목을 자른 다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미군 사진과 생포한 베트콩을 탱크에 묶어 끌고다니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전시돼 있다. 베트콩이 사용했던 땅굴의 모습과 이를 진압하는 미군들의 모습들도 사진으로 남겨져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끔찍한 사진들 밑에 붙은 사진설명이었다. 거기엔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인가를 남기기 위해 이 사진을 전시한다”고 쓰여져 있다.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자극하는 문구가 아닌 ‘평화주의’가 해당 사진이 전시된 이유라는 설명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질만큼 비참한 그리고 끔찍한 하노이 전쟁·역사기념관을 나와 시내를 걸었다. ‘이 나라는 어쩌자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명분이 부족한 베트남전을 일으킨 미국에 대해서 기이하리만치 높은 '호감’을 표하면서도, 자국의 심장인 수도 정중앙에 미국이 자국에 가한 역사를 모든이들에게 전시하고 있는 그 모순 말이다. 하긴 줄잡아 30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 두번의 원자폭탄 투하 피해국 일본이 오늘날 미국과 ‘둘도 없는 친구 국가’가 된 것을 보면 베트남의 ‘친미’가 꼭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길을 걷다 대형 백화점 앞에 또한편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종전 40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이었다. 전시돼 있는 사진은 대략 조금 전 기념관에서 봤던 사진들과 비슷했다. 대부분 흑백이었던 그 사진들은 미국에 의해 국토가 유린돼고 베트남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던 사진들이었다. 사진을 열심히 보는 인파는 거의 없었다. 무관심한 듯 했다. 사진을 보고 있던 한 40대 중년 여성에게 ‘느낌이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들이에요”라고 답했다. 미국이 아닌 전쟁을 그들이 겪은 슬픔의 이유라 생각했다.
▶미국의 자작극 ‘통킹만 사건’= 통킹만 사건은 미국 근대사의 흑역사 가운데 가장 뼈아픈 사건 중 하나다. 1960년대 프랑스가 사실상 손을 놔버린 베트남에선 미국은 베트남에 개입할 명분을 찾고 있었는데, 그 명분으로 통킹만에 정박해있었던 미국의 구축함 매덕스 호가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면서 미국이 베트남 공격을 시작했던 사안이다. 이후 맥나마라 보고서 및 비밀해제 된 펜타곤 보고서 등을 통해 통킹만 사건은 미군의 자작극으로 드러났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베트남전은 ‘명분 없는 전쟁’이란 비판을 오늘날에도 받고 있다.
통킹만 사건을 일으킨 미국의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 암살 당한 뒤 불과 2개월만에 존슨은 베트남 개입을 위해 통킹만 사건 자작극을 사인·승인했다. 역대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존슨의 개인 캐릭터는 ‘무자비함’으로도 악명 높았다. 미국이 왜 베트남전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설득력있는 것은 당시 정가를 휩쓸고 있던 ‘도미노 이론’이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미국과 소련은 1960년대 이후 ‘체제 경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한 국가가 공산화 되면 이웃 국가들 역시 공산화 된다는 논리가 도미노 이론이고, 실제로 남미 국가 상당수는 공산화 경향을 띄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 하에 공산화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미국은 공산화 바람을 막기 위해 그리고 장차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 교두보로 베트남의 가치를 크게 보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돕겠다고 나선 남베트남 정부가 국민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남베트남의 수장이었던 즈엉반민, 응우옌칸 등은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전쟁중 민심 이반을 가속화하는 불교도 탄압, 카톨릭 정책 장려 등 전쟁에 도움안될 일을 벌이고 미군 군수품을 빼돌려 착복하는 등의 부정부패도 넘쳐났다.
결국 존슨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운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이 철수하자 남베트남 정부는 한해도 버티지 못하고 북베트남에 의해 함락된다.
▶초강대국의 무덤 베트남= 베트남 국민들은 자존심에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의 근원엔 강대국들을 상대로 차례로 돌아가면서 싸운 다음 그 모든 전쟁에서 다 이겼다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서아시아에 아프가니스탄이 ‘제국의 무덤’으로 존재한다면, 동남아시아엔 베트남이 ‘초강대국의 무덤’으로 통칭된다.
베트남은 칭기즈칸이 중국에 세운 몽골 대제국 원나라를 상대 했을 때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국가다. 지금도 하노이 곳곳에는 당시 베트남을 원나라 침공으로부터 지킨 쩐흥다오의 동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베트남의 이순신 급으로 평가받는 이가 쩐흥다오다. 국가적 영웅이니 쩐흥다오를 아는 척하면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쩐 장군의 계략은 수전에 약한 몽골군을 유인해 강에서 수장시킨 것인데, 원나라의 침입을 3차례 저지해 베트남에선 ‘무신(武神)’의 반열에 오른 인사다.
베트남은 근세에 들어선 프랑스를 대상으로 독립전쟁을 펴 최종 승리했다.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정예 공수부태 2만여명을 상대로 베트남·라오스 국경지대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됐다. 다만 프랑스가 철수하면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리게 되면서 또한번의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컸다.
미국이 베트남 전을 일으킨 것은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프랑스를 격퇴한지 꼭 10년 후인 1964년이다.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그러나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들까지 소총을 들고 그들의 뒤에서 나타나는 게릴라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전쟁을 일으킨지 7년만에 ‘무조건 철수’ 하게 된다. 13세기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몽골군과 프랑스, 미국을 차례로 물리친 베트남은 그래서 ‘초강대국의 무덤’으로 불리게 됐고, 민족 동질성이 크고 자부심이 강한 국가인 베트남은 어찌보면 한국과의 유사성도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