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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Mar 23. 2021

아우슈비츠, 왜 우리는 유대인 학살에 분노했었나

아우슈비츠, 그 끔찍함 불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은 ‘만행’

스데롯 언덕서 팔레스타인 살인 장면 영화 보듯 관람한 이스라엘

과학이었던 우생학이 인륜 차원의 범죄 자행하게 한 이론 배경 제공

유대인들, 로마시대 이후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의 미움받던 미운오리새끼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는 특유의 이질성에다 고리대금-사채업자 이미지


지난 2014년 7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 한 한국인 가족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입구에 설치된 유명한 아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의미다.
아우슈비츠에 전시된 아이들 신발.

아들은 유대인 가이드에게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행하는 학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그런 것을 왜 물어보느냐. 저 유대인 가이드가 무슨 답변을 들려줄 것 같으냐”고 했다. 아들은 “우리가 유대인 학살에 분노해 여기에 왔지만, 오늘날엔 그 상황이 바뀐 것 아니냐. 내가 왜 유대인의 아픔에 공감을 표했는지를 생각하면, 당신은 내게 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하려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더이상 꺾으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만 혹여라도 있을지 모를 다툼을 걱정하며 ‘그래도 살살 말하라’고 마음을 다잡으셨다. 여기서 아들은 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셨다.

아우슈비츠를 둘러보는 일정을 모두 마친 다음 나는 유대인 가이드 분께 공손히 물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 군의 공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유대인 가이드는 “나는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는다”고 했고, 나는 재차 “오늘 방문객들에게 말씀 하신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유대인 가이드는 동양 청년의 질문에 짜증이 났는지 무리들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다음 파트의 관광객들을 맞이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아우슈비츠, 가해-피해 역사의 역전= 아우슈비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폴란드 주재원들 사이에선 아우슈비츠는 방문지 중 기피 대상이라고 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그래서 매우 유명하지만 막상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선 그 음습함과 끔찍함 때문에 방문평이 좋지 않은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였다. 소위 ‘기피 관광지’ 중 한 곳이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아우슈비츠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십여개의 철도길이 어지럽게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부분 2차대천때에도 사용됐었고, 그래서 그 철로를 따라 수없이 많은 포로들과 전쟁물자들이 실어 날라졌을 그 철로들이었다. 아우슈비츠는 탁 트인 평야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폴란드를 첫 공격지로 타깃 삼은 것 역시, ‘아리아인의 국가를 만들겠다(레벤스라움)’는 그 애초 목표에 적합할만큼 거대한 평야 지대가 바로 폴란드였던데다 평야지역이라 공격이 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략 1시간 가량을 기다려 입장했다. 함께 설명을 듣게 되는 관광객들은 약 20명 가량으로 꾸려졌는데, 아우슈비츠의 모든 건물들을 다 관광하고 나오는데에는 약 1시간30분 가량이 걸렸다. 가는 곳마다 가이드의 음성을 무선 이어폰을 통해 들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이어폰은 해당 건물의 용도와 수용자들의 상태, 사진 설명 등 현장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키가 160cm 정도인 우리의 가이드는 흰 피부의 여성분이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그 유명한 입구 아치를 지났다. 그곳엔 여전히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한다(ARBEIT MACHT FREI)’고 쓰여져 있었다. 노동이 어떻게 아우슈비츠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 대개의 학교 교훈이 ‘근면, 자조, 협동’이었었는데, 그같은 교훈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나 관심있을 그런 교훈이, 아우슈비츠에도 세워졌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가이드의 설명은 절절했다. 가이드는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잔혹한 학살극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 처럼 안타까움과 한스러움을 한가득 머금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특히 가스실로 들어가기 직전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간 어린 아이들의 신발이 모여있는 곳에서 그 가이드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은 목욕을 할 것이란 어른들의 말을 듣고 저항없이 순순히 신발을 벗어 놓고 가스실로 들어갔다. 두번다시 자신의 신발을 신어본 아이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끔찍함, 누구도 웃지 못했다= 그곳은 처참했다. 못먹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성인 다수의 경우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다는 설도 있고, 사람이 굶어 죽을 때까지 며칠이나 걸리는지를 측정키 위한 실험이 그곳에서 진행됐다는 설도 있다. 그곳에 수용됐던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나간 사람은 1200명 뿐이라고 하니, 벽에 걸려있던 빼곡히 많은 사람들의 사진은 대부분이 영정 사진이 됐을 개연성이 높다.

각 건물은 용도가 각기 달랐는데 다수의 경우 침실 등 숙식용으로 지어졌었고, 일부 건물엔 시신을 태우는 시체 소각로도 설치돼 있었다. 가스실에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독가스 캔이 한가득 모여있는 방과, 또다른 방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옷감도 전시돼 있었다.

‘전쟁은 늘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일반화된 평가는 아우슈비츠엔 적용돼선 안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학살은 국가가 동원된 조직적 학살이었다. 거대한 범죄는 위대한 대의 하에 치러진다. 불순한 인종을 추려내면 인류가 보다 영광스러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주장이 그런 조직적 학살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우생학’이 판치던 시절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선 유전적으로 뛰어난 종들 끼리만 교배를 해 후손을 낳아야 한다는 주장도 공공연했다. 사실 이같은 생각은 나치당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유럽 내에선 유대인은 항상 미움받는 대상이었었다.

우생학은 유럽 내 공연히 퍼져있던 선진 상식 같은 것이었다. 태어난 후에 형성된 형질은 후대에 이어지지 못한다는 유전학적 과학의 성과는 ‘태어난 것이 모든것을 결정한다’는 결정론으로 이어졌고, 이는 인종을 후진인종과 선진인종으로 구분하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후진 인종은 절멸시키는 것이 인류를 위해 옳은 일이라 생각했고, 선진인종들끼리만 모여 대를 잇게 해야 인류의 미래가 밝다는 주장도 공공연했다. 사실 미국 에서도 60년대까지도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문제가 있는 흑인들에게 불임시술을 법으로 정했던 주들도 많다. 유전학이라는 과학이 엉뚱하게도 사회과학에선 ‘인종 청소(genocide)’의 이론적 배경이 되게 된 셈이다.

나와 함께 아우슈비츠를 관람하던 관광객들은 그 누구도 그 곳에서 웃지 못했다. 그곳을 다녀간 한국인 폴란드 주재원들 사이에서 ‘음습한 곳’이란 평가도 이해가 된다. 그 어떤 건물도 웃을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진을 찍는 것 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경건한 관광지였다.

▶우리는 왜 아우슈비츠에 분노했었나=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누군가를 비난할 때 다수의 경우 히틀러와 나치를 원용한다. 현혹되게 말을 잘하는 사람에겐 나치 선전상 괴벨스라고 비난하고, 탁월한 독재자에겐 히틀러나 스탈린을 빗대길 즐겨하며, 주군의 충성에 목숨을 내놓는 인사에 대해선 나치의 돌격대장 괴링이라고 지칭한다. 그들이 오늘날 극동의 한 국가에서 비난 받는 이유는 그들이 1차적으론 세계대전에서 패했기 때문이고, 2차적으로는 그들이 잔혹하고 끔찍한 인종청소라는 전쟁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는 집단 수용소의 상징격이다. 나치가 만든 집단 수용소는 독일과 유럽 전역에 모두 27곳이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크고작은 집단수용소의 총 수는 1100개에 이른다.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나치가 운영했던 집단 수용소에서 죽었는지는 통계마다 다른데, 대체로 110만명에서 최대 6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2차 대전 말기엔 폴란드의 수용소를 비워 독일로 행진하던 수용인원 거의 대부분이 길에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아우슈비츠를 최초로 발견한 국가는 소련이었는데, 발견 당시 생체실험이 진행중이던 180명의 아이들이 의사와 함께 발견되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그 학살의 끔찍함 때문이다. ‘최종결론(final solution)’을 내리는 캠프로 아우슈비츠가 분류된 뒤엔 아우슈비츠로 실려오는 절대 다수는 노동이 아닌 학살을 위해 그곳으로 옮겨졌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해 2차세계대전에서 패할 가능성이 커졌을 때엔 그 학살의 속도는 현저히 올라갔다.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것보다 철도 사용 우선권을 가졌던 것이 유대인 등 ‘불순인종 청소’였다. 그곳에는 유대인 외에도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 도시 외곽에 집도 절도 없이 살던 집시들, 동성애자들, 폴란드인 등이 수용됐다. 유대인들 외에도 사회적 취약계층이었던 집단 다수가 그곳에서 노동으로, 추위와 배고픔, 학살 등으로 사망한 것이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분노했던 이유는 그 피해자들이 유대인이어서가 아니다. 아우슈비츠엔 유대인보다 더 많은 수의 사회 취약계층들이 수용됐고 결국엔 절멸됐다. 피해자가 누구냐에 따라 분노가 선택적으로 작동해서는 안된다. 같은 이유로 나는 유대인들의 국가 이스라엘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고 있는 인종청소급 말려죽이기에 대해 똑같은 규모의 분노를 표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스라엘은 왜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나= 내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던 2014년 7월은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이 들끓을 때였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무차별 포격을 퍼부어 수천명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새까맣게 밀집돼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마을과 건물에 떨어진 포격은 민간인과 군부대를 구별치 않았고,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 측의 저항은 소총 공격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이스라엘 청년들이 스데롯 고원에 올라 맥주를 마시면서 불타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관람하고 있다. 2014년 7월

비난이 들끓은 원인은 한 이스라엘 청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때문이었다. 해당 사진은 이스라엘 지역의 스데롯 고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날아가는 포탄을 보며 ‘폭죽’이라고 얘기하고,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소파와 의자를 가져와 맥주를 마시면서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의 제목은 ‘스데롯 극장’이었다. 밤이 되면 포탄이 발하는 불빛을 더 잘 확인할 수 있었기에, 주 관람객은 밤에 더 많이 올라온다고 쓰여져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진 포격으로 다음날 뉴스에선 간밤의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민간인들을 포함해 모두 719명이 사망했고,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나왔다. 과거 유럽에서 탄압받았던 유대인들이 오늘날 이스라엘에선 가해자가 되는 장면이 선연했다. 전세계 취재진들이 몰려들었지만 ‘스데롯 극장’이 널리 알려지면서, 되레 더 많은 수의 이스라엘 국민들이 해당 장면을 보기 위해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기도 했다. 이스라엘을 향한 국제 사회의 비난에 개의치 않는다는 인터뷰 보도도 뒤따랐다.

CNN이 이스라엘에 파견했던 한 특파원은 ‘유대인의 힘?... 이스라엘의 악마'라는 제목의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러시아로 전보 조치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국 내 유대인 세력의 힘을 실감케 한다는 조소에도 불구하고 CNN은 해당 특파원을 다른 곳으로 발령 내버렸다. 우리가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만행에 분노했던 것과 같은 크기의 분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표출돼야 한다고 믿는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을 때, 그리고 그 약자의 저항이 어쩔 수 없을만큼 턱없이 미약할 때 그들의 아픔에 동조하고 연대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가피 역전= 역사에는 수없이 많은 수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상황이 역전되는 경우가 있다. 가해자가 보다 포악해 지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본인들이 받았던 피해의 역사가 그 포악함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2020년의 중국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가혹하리만치 잔인하게 대응하는 그 연원에는 홍콩을 빼았겼던 과거의 ‘난징조약’의 아픔이 적지 않다. 차를 너무 많이 수입하게 되면서 이뤄진 무역 적자 탓에 영국이 아편을 중국에다 팔게되면서 벌어진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피해자였던 중국이, 오늘날에는 홍콩인들에 대한 가해자로 바뀌게 된 것이 오늘날 홍콩 사태의 연원이다.

오늘날 일본인들 다수가 2차 세계대전에서 본인들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아베 정권과 스가 정권의 지지자가 되는 사항도 사실은 가피 역전의 역사 가운데 하나다. 사실 일본이 2차 대전의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에는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수없이 많은 전쟁의 기록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수의 인명이 사라진 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과 중국 등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 국권 침탈을 당했던 국가들 입장에선 일제가 원자폭탄을 맞은 것은 ‘자업자득’이란 인식이 보편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가 미얀마 내 소수민족인 로힝야 족에 대한 탄압 정책을 펴고 있는 것 역시 과거 버마족들이 로힝야족으로부터 받았던 탄압과 착취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미얀마 식민 통치 시절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소수민족이었던 로힝야족을 미얀마로 이주시켜 농장을 경영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버마족 등 미얀마 토착 주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했다. 로힝야족의 버마족 탄압이었다. 로힝야족에 의한 미얀마 토착주민 학살은 아라칸 학살으로, 약 2만명이 죽었다. 현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 역시 로힝야 족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사다. 가피 역전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유독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치 독일’을 비난하는 사례가 많고, 왜 일본은 반성을 하지 않느냐며 독일의 사과를 사례로 원용 하는 빈도가 많은 것 역시, 그리고 유독 유대인들의 피해에 보다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았던 식민 시절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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