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4학년 가을쯤 되면 실습은 슬슬 끝이 나고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들어간다. 다음 해 1월에 있는 의사국가고시에 붙어야 길었던 6년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에, 11월, 12월은 정말 대입 시험 볼 때처럼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한다. 그렇게 열람실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며 공부를 하고 있을 즈음, 내 맞은편에 앉아서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응급의학과 선배 (그때 그 치프 선생님)가 하루는 선배들이랑 맥주 한잔하자는 것이다. 동아리 선배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한잔하자는데 쉽게 뿌리치긴 힘들다. 공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조금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따라 나간 그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엔 응급의학과 3년 차 선배도 한 명 더 나와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고 ‘아, 교수님은 연애도 안 하나, 왜 맨날 불러서 술 마시 자는지 모르겠네.’ 하며 숙취로 머리를 쥐어뜯던 선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든 그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한 잔이라도 덜 마셔볼까 하는 꿍꿍이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동아리 선배들과 맥주 한잔하겠거니 하고 따라 나갔다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조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는 술이 최고다. 맥주 한잔, 두 잔 들어가다 보니 약간의 취기가 오르며 즐거운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는 생각보다 다양한 화제로 술자리를 재미있게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밤 11시, 그쯤에서 끝내고 기숙사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테킬라 한잔하겠냐는 물음에, 모르는 티 내기가 쑥스러워 무슨 술인 줄도 모르고 그러자고 했다. ‘호세 쿠엘보’ 한 병과 소금, 레몬이 함께 나왔다. 엄지와 검지 사이 손등에 레몬즙을 살짝 바르고, 그 위에 소금을 뿌려서 묻힌 뒤, 술 한잔하고 그것을 안주로 핥아먹는 거라고 시범을 보여주길래 그대로 따라 했다. 처음 마셔보는 술과 그 특이한 방식, 그리고 새콤한 레몬과 짭짤한 소금 맛에 끌려 얼마나 독한 술인지 모르고 홀짝홀짝 몇 잔을 더 받아 마셨다.
다음 날 눈 떠보니 기숙사 내 침대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와서 자고 있는지 떠올려보려 했으나 생각나는 건 테킬라를 홀짝거리며 신나게 웃고 떠들던 기억뿐이다. 생각해보니 마신 알코올 양이 거의 소주 두 병쯤 되는 터라 필름이 안 끊기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나를 불러냈던 선배에게 전화로 기억 안 나는 부분에 관해 물어보니, 술집에서 나와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취해서 비틀거리길래 잡아주려고 했는데, 그 손들을 뿌리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뛰어가더라며 왜 그랬냐고 되묻는다.
글쎄. 왜 그랬을까?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독립심? 생각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수많은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중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잤는지, 속은 괜찮은지 묻는 안부 문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기억이 없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배에게 내 번호를 물어 안부 문자를 보내온 그의 마음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속이 좀 쓰리긴 한데 괜찮다고, 답장해 주었다. 몇 번의 문자가 오간 끝에 그가 해장국을 사주겠다며 나오라고 했다. 주고받은 문자가 그냥 안부 문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 번은 튕겨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을 보면 어제의 술자리가 즐거웠던 만큼 나도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던 거 같다. 그리고 아마 어렴풋이 그의 마음을 눈치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밥은 먹고 정신을 차려야겠기에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쓰린 속을 부여잡은 채 그를 만나러 나갔다. 그런데 나를 태우고 그가 간 곳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해장을 무슨 이런 곳에서?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매콤한 국물 파스타가 해장에 좋다나 뭐라나.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게 그의 매력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국물 파스타는 정말 해장하기에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