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에서 해장 파스타를 먹은 뒤로도 며칠에 한 번은 그에게서 문자가 왔고, 가끔은 내가 먼저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교수님과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지만, 공부만 하느라 지루한 일상에 작은 설렘으로 다가왔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나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문자와 공부에 대한 응원의 문자는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고, 시험이 끝난 뒤의 일상을 상상해보는 짜릿함도 있었다.
그렇게 2주쯤 지났을까. 밥 먹으러 가자고 항상 같이 밥 먹던 사람처럼 무심하게 던진 문자에 나는 혼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맨날 편한 옷차림에 슬리퍼 신고 열람실만 들락거리다 무슨 옷을 입고 나갈지 고민하며, 화장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또 얼마만인지. 병원 정문에 서 있다가 약속시간에 나타난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랑 단 둘이, 조수석에 타고 어딘가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학생 시절 연애는 모두 뚜벅이와 했었다.) 아, 왜 이렇게 떨리지? 어디를 갈지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출발한 차는 한참을 달려서 꾸불꾸불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이쯤에서는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점심 뭐 사주실 거예요?”
“닭도리탕. 토종닭 바로 잡아서 만들어주는 곳이 있는데 진짜 맛있어.”
40여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의 이름은 ‘락원식당.’ 식당 주변에 닭장과 토끼우리가 보였고 나무판자로 된 메뉴판에는 닭도리탕, 토끼탕, 닭백숙 이렇게 세가지만 삐뚤빼뚤한 매직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적당히 간이 밴 닭도리탕은 가슴살도 쫄깃쫄깃한 토종닭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한 맛이었다. 이런 식당은 어떻게 알고 데려왔을까 하는 의문이 잠깐 스치고 지나가며, 정말 힘내라고 밥 사주려는 것 이상의 아무 의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와서 나는 또 열심히 공부하고 가끔 문자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시험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마지막 힘을 내서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는데, 띠링~ 문자가 왔다. 이번에도 시험 잘 보라고 밥 사준다며 나오라는데, 시험이 얼마 남았다고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손가락은 벌써 ‘네!’라고 답을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라 처음만큼 어색하거나 떨리지는 않았고, 이번에는 또 어떤 곳에 가서 밥을 사 주려나 하는 기대감도 상승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장소 선택. 60km를 넘게 달려서 삽교호 근처의 유명하다는 우렁이 쌈밥집에 도착했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꽉 들어찬 손님들이 여기가 엄청난 맛집이라는 그의 설명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닭도리탕도 쌈밥도 우리 집에서는 그냥 집에서 먹는 음식이기에 이런 음식을 식당에서 먹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식당들을 알고 있는 이 남자가 뭔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그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에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잘 보라는 의례 하는 말들을 들으며 맹숭맹숭 헤어졌고, 시험 끝나고 연락하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열흘 뒤 나는 후배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고사장으로 들어가 의사국가고시를 무사히 치렀고, 끝나고 나오는 길에 후련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 문자 했다.
‘시험 끝났어요. 이제 집으로 가요.’
그동안 기숙사에서 있다가 이제는 학교에서 할 일이 없으니 짐을 싸들고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 준 밥 먹으며 룰루랄라 지내면서도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물론 2주 뒤 친구와 가기로 한 유럽여행을 준비하느라 생각보다 바쁘게 지내긴 했지만.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그에게서 합격을 축하한다며 기다리고 있던 전화가 왔고 마침 인턴 서류 내느라 병원에 와 있던 나에게 축하주 한잔하자며 나오라고 했다. 그 전화를 받으며, 이제 시험도 끝났고 합격을 했으니 조금 있으면 나도 이제 학생이 아닌 사회인이 되는데, 드디어 무언가 말을 하려나 보다 하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단둘이 밥은 여러 번 먹었지만, 술을 마신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학교 앞 건물 2층 레스토랑 겸 호프에서 카프리 병맥주 세트를 시켜놓고 잔에 따라가며 마셨다.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가고, 시간은 점점 흘러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틀 뒤면 유럽 여행을 떠나야 해서 다음날은 일찍 서울로 올라가 짐을 마저 챙겨야 했기에 자리를 정리해야 할 때였다.
나는 오늘은 정말 그에게 들을 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계속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 내가 먼저 고백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이 날도 먼저 말을 꺼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별로 없고, 이대로 유럽여행을 가버리면 또 2주간의 시간은 그냥 지나가게 된다. 여행 다녀오면 바로 인턴 준비하느라 또 바빠질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아무 말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먼저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교수님…. 우리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긴….”
“저는 뜨뜻미지근한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귀면 사귀고, 아니면 말고요.”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그는 보기에나 말하는 스타일은 굉장히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는데, 연애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던 것인지, ‘우리 사귀자’라는 말이 그렇게나 어려웠나 보다.
“그래서 저 좋아하세요? 우리 사귀는 거예요?”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밥을 사주는 남자가 어디 있어?”
“알았어요. 그럼 오늘부터 우리 1일인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본격적인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