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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핑거 Jun 08. 2023

잘 키워줬다vs잘 컸다

(주부에세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결


갑자기 찬 공기가 몸을 감싸며 체온을 떨어뜨린다. 변화를 느낀 체온은 즉각 신경에 신호를 보내고, 부드럽던 살결을 닭살로 오돌오돌 변화시킨다. 한기를 느끼며 팔을 가볍게 감싸안는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게 걸칠 옷을 찾으려는 본능과 동시에 드레스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달라진 체온 변화에 단단히 대응한다. 그제서야 ‘오늘의 날씨’를 확인해본다. 그러고 보니 비소식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하필 아이들이 하원하는 딱 그 시간에 비예보가 있다. 우산을 챙겨들고 아이들 하교길에 어슬렁 어슬렁 나서본다.




고깟 비 조금 맞아도 되는데...


엄마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숱한 경고를 무시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 내 아이를 찾아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건네느라  바쁜 엄마들이 뒤엉켜 학교 앞과 안이 인산인해이다. 비가 많이 왔으면 나도 본능적으로 안으로 뛰쳐들어갔을텐데, 부슬 부슬 맞을만 한 비라 여유를 좀 부려본다. 밖에서 아이들이 나올때까지 기다리던 중, 막내아이가 학교 정문으로 나왔다는 알림이 울린다.

아직 어린 초등학교 1학년 막내아이다.







우산을 가지고 데릴러 온 무수히 많은 엄마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느라 아이가 애를 타고 있진 않을지 초조한 마음에 그제서야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막내가 보인다.

어...

그 옆에 둘째 아이도 보인다.

둘째 아이는 처음보는 낯선 우산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막내아이가 있다. 아이도 낯선 우산을 야무지게 챙겨들고  형아들 옆에 찰떡같이 붙어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색다른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색다름이란 것은 초조했던 내 불안을 한 방에 날려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 앞에서 본 풍경은 우산없이 간 둘째아이가 친구 우산을 빌려쓰고 있었고, 어린 동생을 챙겨 데리고 나오면서 친구 우산까지 동생에게씌워줘 동생을 보호하고 있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분주하면서도 어린 동생에게 우산을 들려 야무지게 동생을 챙겨오는 녀석이 어찌나 멋있어보이던지...




“성운아. 형아가 성운이 교실 앞에서 기다렸어?“

“응”

“친구들하고 다 같이?”

“응.”

“와, 형아 진짜 멋지다.

멋진 형아 덕분에 우리 성운이 비도 안 맞고 잘 나왔네.”

“응”








늘 학교 끝나고 놀다 오는 아이들이 비가 와서 놀이터에 갈 수 없게 되자 다들 우리집에 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주말에 잠깐 놀러와서 보드게임을 재미있게 하고 간 친구들이 또 현준이네 집에 놀러가고 싶다는 것이다. 예쁘고 착한 아이들에게 나는 흔쾌히 집을 내주었다. 부모님들께 허락을 맡게 한 후,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집으로 와 간식으로 내주며 아이들이 잘 노는 모습을 확인하며 거실을 통크게 내주었다. 아이들은 앉아서 보드게임을 재미있게 즐겼고, 놀고 나서는 정리까지 싹 하고는 자신의 책가방을 챙겨 야무지게 학원 시간에 맞춰 돌아갔다.

아주 깔끔하다!





아이 곁에 이런 멋진 친구들이 있다니 참 감사했다. 그리고 어쩜 어린 동생을 챙기고 친구 우산까지 씌워서 데리고 나올 생각을 했는지, 생각할수록 기특했고 내 아들이지만 멋졌다.



“현준아. 넌 어쩜 그렇게 멋있어?

엄마는 현준이만 보면 하트가 막 떨어져!“

아이가 시크하게 대답한다.

“잘 키워줬으니깐!”








그 순간 큰 아이가 어버이날 써준 편지가 오버랩되었다.

지금까지 잘 키워주셔서 제가 이렇게 멋지게 자랐어요. 앞으로도 잘 키워주시면 더 멋진 아들 될게요!

앞으로도 잘 키워주세요!“

위트 있는 감각을 담은  아이의 편지에 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내가 잘 키워준걸까?

아이들이 잘 큰 걸까?

나는 별로 해준 게 없는 것 같은데 아이들이 나에게 ‘ 키워줬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잘 큰 아이들’이 요즘 나에게 주는 소소한 기쁨은 크나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잘 컸다는 것이 사실 별거 있나. 무탈하게 잘 큰거. 정말 잘 컸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참 감사할 수 있는것이다.



잘 컸어 참.

잘 키워서 잘 큰건지, 잘 커서 잘 키운 것 처럼 보이는건지 많이 헷갈리지만 어쨌든 무탈하게 잘 커준 것도 고마운데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주니 정말 고맙다. 아들들아.



그리고...

내가 잘 키운 거 맞지 여보?





이상하게 남편에게는 인정받고 싶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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