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서하는 마음 2
최근 낙서의 패턴이 바뀌었다.
공부방에 스미스 7세가 등장했다.
종이컵 중간쯤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스미스 7세라 쓰여있다. 그런데 나날이 발전하더니 스미스 7세, 히털어 1세, 윌슨 2 단세까지 등장했다. 그러다 무슨 ‘7 단세’, ‘5 단세’까지…. 이게 뭔가 했더니 현재 공부하는 교재에 붙은 7단계 10단계와 결합한 듯하다.
‘뭐지?’
‘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도대체 스미스 7세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일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 신문에는 엘리자베스 2세 관련 신문 기사들이 많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일대기를 요약한 신문 기사부터 영국 문화 관련 기사까지 다양한 주제로 신문 기사가 쏟아졌다. 이참에 아이들과 함께 영국 문화와 세계사에 대한 흥미도 갖게 할 겸 영국과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거의 400년의 시차는 있지만 엘리자베스 2세를 읽으면 당연히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서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모친 앤 불린과 부친 헨리 8세의 생애까지 파란만장한 출생 배경과 역사의 현장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흥미 있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냥 다 쓴 종이컵에 공부하기 싫어 낙서했나 보다 하고 무심코 버렸는데. 공부하는 중간중간 아이들끼리 스미스 7세에 대해 뭐라 뭐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서만 한 것이 아니고 그 낙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한 학생의 종이컵에서 스미스 7세가 등장하더니 여기저기에서 스미스 7세와 그 일당들이 등장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매일 청소할 때마다 낙서한 종이컵을 발견하는데 낙서하는 현장을 보지 못했다. 내 책상 위치가 아이들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데도 스미스 7세를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낙서 현장은 내가 술래가 되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동안에만 빠르게 낙서해야 하는 게임 현장 같다.
공부방이 끝나고 난 후 책상 여기저기에 버려진 종이컵을 하나둘씩 모았다. 이걸 그리는 동안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근 하기 싫은 수학 공부하느라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아마도 그리는 동안에는 낙서 자체를 즐기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했으리라.
작은 종이컵에 그려진 스미스 7세의 표정은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의 표정을 닮았다. 공부하다 몰래 스미스 7세를 그리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다 아예 시간을 내어 종이컵에 자유롭게 그림 그리는 시간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얘들아, 오늘은 종이컵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란다. 너희들 마음대로 종이컵에 그림을 그려 보렴”
“...”
그냥 상상만 해봤다.
내가 아무리 ‘자유롭게’, ‘너희들 마음대로’라고 얘기하더라도 ‘몰래 했지만, 자발적으로 했던’ 상황과는 다르다. 자신의 자유로운 감정과 상상의 표현이던 것이 갑작스럽게 강요되면 그때부터는 휴식이 아니고 또 다른 공부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던 것에서 의식하도록 강요하면 그 그림에서 ‘자유’가 사라진다. 낙서는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의 표출이다. 그 어떤 것의 강요도 없이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욕구의 표현이다. 그러다 보니 심리학자들은 낙서를 근거로 잠재된 의식을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내가 심리학자가 아닌지라 아이들의 의식이 어떤지는 해석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스미스 7세를 그리면서 잠시나마 자유로움과 평안을 느꼈을 것임을 확실히 알 것 같다. 삐뚤빼뚤 그려진 스미스 7세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너도나도 스미스 7세를 그리면서 함께 즐기는 낙서가 되었다.
당분간 내가 술래 역할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