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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Aug 05. 2023

라면 파티 1

   <월요일>     


“자 이번 라면 파티는 돌아오는 금요일이야. 각자 먹고 싶은 라면을 써보자.”

“와~”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라면을 골라 적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쩌면 라면 먹는 날보다 자신이 무슨 라면을 먹을지 생각하는 시간이 더 즐거운 것 같다. 새로 나온 라면이나 맵기의 극한에 도전하고 싶은 라면 등 한 달에 한 번 있는 시간에 단 하나의 라면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라면 적는 시간은 자못 심각하다.      


A4 반절 크기의 종이를 하나에 한 명씩 이름을 쓰고 자신이 먹고 싶은 라면을 적는다. 시중에 파는 라면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 단 내가 직접 끓여줄 수는 없고 물을 부어 먹는 라면으로 고르게 한다.     


지훈 - 육개장(큰 거) / 명훈 - 너구리(큰 거) / 재훈 - 불닭(큰 거) / 도훈 - 불닭짜장(큰 거) 없으면 진짬뽕 / 지은 - 콕콕 스파게티 / 명은 - 생생우동 / 재은 - 짜파게티(큰 거) / 도은 - 튀김가락국수(작은 거) / ○○ - 진짬뽕(큰 거) / ○○ - 백짬뽕(큰 컵) / ○○ - 진라면 매운맛(작은 컵) / ○○ - 불닭4가지치즈맛 없으면 간짬뽕          


나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볼 때 한꺼번에 사고 싶은데 가끔 아이들이 편의점에서만 파는 라면을 고르면 여기저기 편의점을 돌아다니면서 라면을 공수해야 한다. 어느 땐 주변 편의점과 동네 슈퍼를 다 찾아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새로 나온 라면은 어디서 파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아이들이 어디에 위치한 어느 편의점을 가라고 설명까지 해준다. 가끔 품절인 경우를 대비해 대안용 라면을 별도로 쓰기도 한다. 라면값이 너무 비쌀 경우에는 내 처지까지 생각해 주어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14년 전 공부방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종이냄비에 라면 끓이기’라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라면 파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당시에도 신문 기사를 매일 읽었는데 마침 '종이냄비에 라면 끓이기' 관련 기사가 나왔다. 아이들과 재밌게 할 수 있는 이벤트를 생각하던 차였기에 종이 냄비가 불에 타지 않고 라면을 끓일 수 있는 과학 원리까지 공부하는 매우 좋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불과 뜨거운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봉지를 뜯고 라면과 수프를 끓는 물에 넣는 것까지만 한다. 이후 각자의 자리까지 종이냄비의 라면을 가져다주고 먹은 걸 치우는 건 온전히 나의 일이다. 종이 냄비에 라면을 끓이는 이벤트는 대성공이었다. 그날 하루는 공부를 하지 않고 종이냄비에 라면을 끓이는 내용의 어린이 신문을 함께 읽고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는 시간이니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이후에도 몇 번 하다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일단 종이냄비의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 한 번 끓일 때마다 종이 냄비 하나를 써야 한다. 종이라는 성질 때문에 일회용이니 환경 문제도 있고 종이냄비 안에 있는 비닐 코팅이 직접 불로 가열하여 건강에도 해롭다. 게다가 공부방 시작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종이냄비에 라면을 학생 수만큼 계속 끓여야 하는 고된 노동 때문에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용기 라면이었다.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부어주기만 하면 번거로움 없이 삼삼오오 모여 라면을 먹는다.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용기 라면이지만 매일 공부를 해야 하는 장소에서 공부를 하지 않고 친구들과 라면을 먹는다는 점에서 더 즐거운 일로 여기는 듯하다.


마침 이번에는 어린이 신문에서 우리나라 라면 탄생 60주년 기념 기사가 나와 주말 원고지 쓰기용으로 준비했다. 최초의 라면부터 현재의 라면까지 라면의 변천사와 라면이 왜 꼬블꼬블한지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 등을 읽고 재밌게 라면을 먹을 계획을 세웠다.           



<목요일 밤>     


아이들은 이번 라면파티가 마지막 라면파티인 줄을 모른다. 2주 후면 공부방 문을 닫는데 학부모에게 아이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한 학기 공부를 마무리하도록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공부방이 문을 닫는다고 하면 마음이 흐트러져 짧은 2~3주도 참지 못하고 제대로 집중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게다가 감성이 여린 학생들은 공부방을 떠난다는 사실에 괜히 울적해져 남은 기간 공부에 집중을 못하기도 한다. 물론 좋아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던 싫어하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너무 일찍 아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      


이로써 15년 간 운영했던 공부방을 마무리한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신종 플루, 메르스, 코로나로 위기가 있었지만 아이들 모두 건강하게 잘 이겨낸 것이 내심 자랑스럽기도 하다.     


당분간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아이들이 생각날 것 같다.      

라면 하나에 추억과...

라면 하나에 우정과...

라면 하나에 유쾌함과...

라면 하나에 매콤함과 뜨거움....


라면 하나에 그동안 함께 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세훈, 형남, 민준, 택진, 택준, 종민, 시온, 태주, 현환, 시온, 윤서, 미셸, 은솔, 니키타, 케빈, 민수, 교범, 민교, 채은, 동환, 문중, 서현, 성아, 수인, 예빈, 아영, 나영, 지선, 우중, 재민, 윤성, 동환, 정현, 지효, 채이, 채원, 태혁, 혜원, 현준, 민서, 윤영, 서연, 지빈, 재화, 슬기, 혜빈, 수빈, 준성, 은혁, 승혁, 찬희, 승준, 예준, 다원, 철희, 태현, 지우, 건우, 승훈, 윤아, 지호, 도현, 리안, 설, 건, 예서, 수현, 인희, 주원, 남주, 찬영, 현빈, 지혜, 소영, 희준, 성빈, 성욱, 윤호, 승기, 민서, 서윤, 준기, 지원, 우현, 유정, 태용, 유빈, 수빈, 우영, 민재, 홍원, 은영, 서이, 가영, 석종, 시원, 범교, 서희, 서연, 민주, 주환, 세윤, 진엽, 상아, 태주, 준현, 유찬, 하얀, 혁, 기태, 세림, 나현, 정연, 은, 효림, 도원, 도준, 은소, 현아, 동민, 영배, 보민, 효준, 태연, 강산...

그리고 당장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고 떠오를 이쁜 아이들.     


내일 있을 마지막 라면 파티를 생각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들지 못했다. 여러 기억들이 라면 면발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는 밤이다. 남은 시간 아이들에게 좀 더 잘해 주고 끝마무리를 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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