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 4월 초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멀리 보이는 응봉산의 샛노란 개나리를 보고 새삼스레 놀랐다. 어느샌가 봄꽃의 대명사가 된 벚꽃으로 개나리의 존재감이 미미해지던 차에 노랗게 산을 가득 채운 개나리를 보면서 어릴 적 봄꽃의 대표는 개나리였다는 기억이 났다. 느닷없이 시작된 벚꽃 잔치로 노란 개나리의 생기 가득한 선명함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피고 봄비와 함께 사라지는 벚꽃이 마치 봄의 절정인 것 같지만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봄꽃들로 길가는 다시 술렁이고 있다.
꽃들마다 꽃 피는 시기를 알람 시계로 맞춘 듯 목련,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차례로 피고 봄비가 오더니 다음 순서의 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피고 있다. 2월 말부터 5월까지 꽃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면서 “이제 내 차례야”를 외치며 피고 지기를 반복하니 봄길은 꽃들의 런웨이를 보는듯하다. 꽃 감상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의 향연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힘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금은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했던 3월 말 4월 초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후부터 피는 꽃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색으로만 알리지 않는다. 흰색, 다홍색, 진분홍 색의 철쭉이 아파트 화단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길바닥의 보도블록 틈 사이에서 민들레도 지지 않으려는 듯 자리를 잡고 노란빛을 내뿜고 어떤 건 털씨가 바람에 실려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때부터 슬슬 눈이 가렵기 시작했다.
바람에 버드나무 씨앗 솜털이나 민들레의 홀씨가 날리지만 이는 알레르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공기 중에 흩날리는 솜덩이만 봐도 재채기가 연거푸 나오니 괴로울 수밖에.
이제 소나무 차례다. 군데군데 뭐 이리 급한지 송화가 노랗게 올라왔다.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창문도 함부로 열지 못한다. 비가 내리든 바람에 다 날려가든 이 노란 가루가 다 쏟아져 내려야 나의 봄 나기도 끝이 나는 것이다.
이 불청객을 잘 견뎌내면서 꽃들을 감상해야 한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견디기가 힘들다. 해년마다 이맘때 사용하는 알레르기용 안약이 약효가 떨어진 것인지 그동안 너무 써서 내성이 생긴 것인지 약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 예년에는 5ml 한 병을 다 쓰기 전에 봄꽃의 향연이 끝났는데 아직 송화가 다 완전히 피기도 전에 한 병을 다 쓰게 생겼다. 늘 이맘때는 안약을 먼저 쓰고 더 심해지면 알레르기 약을 먹는데 먹는 약을 처방받아야 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 꽃가루 알레르기로 하루하루가 몹시 힘들다.
최근 학생들과 봄꽃과 꽃가루 알레르기 관련 기사를 읽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한 나의 의도로 선택한 기사다. 온난화로 봄꽃이 피는 시기가 앞당겨졌고 올봄은 유난히 꽃가루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 꽃나무에 농약을 많이 쳐서 더 해롭다는 얘기도 있다. 아이들은 꽃가루 알레르기가 없는지 신문을 읽으면서 별다른 얘기들이 없다. 기사에 격하게 공감하거나 자신들과 관련된 기사를 읽을 때는 읽으면서도 웅성웅성, 읽고 나서도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느라 바쁜데 꽃가루와 관련해서는 조용하다. 몇몇 학생들만 꽃가루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눈을 비벼도 아무렇지도 않다며 씩씩하게 얘기한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다.
늘 봄에는 꽃가루 알레르기로 눈은 결막염, 코는 비염으로 고생한다. 눈이 가렵기 시작하면 비벼도 비벼도 가려워 눈이 벌게지고 코에서는 눈물이 코로 나오나 싶을 정도로 맑은 콧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심할 때는 눈물도 흐르고 눈 주변과 귓속도 가려운데 더 심해지면 귓바퀴를 따라 귀 속에서 콧속까지 뚫린 아주 작은 길이 느껴질 정도다. 다행히 자기 전에 먹는 천식약으로 기침은 하지 않는다.
씨앗 솜털과 꽃가루는 봄꽃 감상을 마냥 편안하게 즐기도록 놔두지 않는다. 눈과 코와 귀, 기관지 모든 곳이 꽃가루에 점령당한 상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천식약과 알레르기약이 없던 시대에 나와 같은 체질의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운 봄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을 제대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약에 의지하는 지금도 약으로 일부 몸의 상태를 편안하게 만들긴 하지만 부작용으로 생기는 졸음을 해결하진 못한다. 알레르기 비염약이나 안약을 사용하면 지독한 졸음을 견뎌야 한다. 알레르기용 안약을 눈에 넣고 자면 새벽에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고 일어나도 졸음 때문에 비몽사몽으로 휘청거린다.
젊을 때는 꽃에 대한 감흥이 없어 꽃이 피지 않는 극지방에서 살면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겠다 싶었다. 나이를 먹어 50을 넘고부터는 주변 꽃들의 변화가 눈에 띄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아기자기한 풀과 나무, 꽃들에 시선이 머무는 일이 잦아졌다. 젊을 땐 하늘의 구름만 보았던 것 같다. 그런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와 내 주변의 식물들에 관심이 생겼고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의 빛깔과 모습이 달리 보이게 되었다. 나이 탓이라고 하고 싶지 않지만 길바닥의 민들레와 토끼풀도 반갑다. 그러니 꽃가루의 독성을 감수하며 봄을 견디는 것이다.
아직 송화와 이팝이 피고 지기까지는 한 달이 더 남았다. 이 시기를 잘 견디고 나면 여름이 오겠지. 여름부터는 알레르기 걱정을 덜해도 된다. 그때까지 예쁜 꽃들을 감상하면서 잘 견뎌야 한다.
가렵거나 졸리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