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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Jun 18. 2023

필사, 드디어 놀이가 되다

오늘은 원고지 몇 쪽까지에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문득문득 생각나면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물어본다. 주말 동안 써야 할 원고지 필사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심지어 문자나 톡을 보내기도 한다.

‘원거지 몇 쪽이에요?’( 2, 3학년 저학년 학생들은 아무리 원고지라고 알려 줘도 늘 맞춤법이 틀려 원거지라고 찍어 보낸다.)     


“미안, 아직 신문 기사를 못 찾았구나.”

“그럼 짧게 해 주세요.”

“그게 기사 분량이 정해져 있어서 내용을 무시하고 막 줄일 수가 없는데...”

“그래도 짧은 걸로요.”

“그래, 짧은 걸로 찾아볼게.”     


아이들은 이 원고지 필사를 싫어한다.

“원거지, 이거 왜 써요?”라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글을 잘 쓰기 위해 꾸준히 조금씩 하는 연습이라고 알려주지만 자신들에게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해도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거다. 그러니 매주 금요일마다 가져가는 이 쓰기 숙제의 분량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공부방에서는 되도록 그날 해야 할 공부는 다 끝내고 귀가하기 때문에 그날 유난히 떠들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숙제가 없다. 하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아이들이 읽을 만한 어린이 신문 기사를 원고지에 옮겨 인쇄한 후 그것을 보고 그대로 베껴쓰기를 한다. 이 숙제는 매주 금요일마다 공부방에서 10년 넘게 진행하는 글쓰기 훈련 중 하나이다. 메르스 사태로 2주간 공부방을 쉬는 동안과 코로나로 몇 개월씩 쉬는 기간에도 원고지 쓰기를 계속했다.


1주일 동안 학생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생각할만한 기사를 선택하여 큰소리로 두 번 정도 읽은 후 한 단락씩 보고 쓰는 것이다. 400자 원고지 형식에 쓰지만 보고 쓰는 기사도 함께 인쇄되어 있기 때문에 분량은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4~5장, 많을 땐 8~9장 정도이다. 보고 쓰기 편하게 단락별로 인쇄하여 그 단락 아랫부분에 읽으면서 그대로 쓰면 된다.      


집중하지 않으면 글자를 빠트리기도 하고 쓴 줄을 또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집중을 해야 한다. 써야 할 단락의 줄 수가 4줄이면 정확히 똑같은 수의 줄을 남겼기 때문에 집중해서 쓰지 않으면 줄이 남거나 부족해진다. 그러면 틀린 부분을 찾아 거기서부터 다시 써야 한다.      


필사를 하면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며 필사를 극찬하는 여러 책에도 나와 있듯이 초등생들에게 집중력을 키우고 올바른 문장 쓰기 훈련을 하는 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글을 문장 형식으로 잘 쓰지 못하고 단어만 나열하거나 맞춤법이 많이 틀리는 아이들이 이 연습을 하면서 좋아졌다.      


하지만 내용이 재미없으면 아이들이 쓰는 것 자체를 더 싫어할 수 있어서 지루해하지 않도록 흥미를 끌 수 있는 최신 기사를 취사선택하여 쓰도록 한다. 필사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주제는 비슷해도 동일한 기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매주 어린이 신문을 확인해서 문장도 좋고 내용도 흥미로운 기사를 찾는다. 가끔 일반 성인들이 읽는 기사 중 짧고 유익한 기사를 선택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간 소개 기사를 읽고 쓰게 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어린 시절 공부를 못해 선생님한테 혼났던 일화를 읽을 땐 격하게 공감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소설가라고 신문기사로만 읽을 반응이 없다가 책꽂이에 꽂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러 책들을 보여 주니 그제야 그의 유명세를 실감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아이들 입에서는 ‘베르베르~’, ‘베르베르~’라면서 그 이름이 나올 상황도 아닌데 말끝마다 후렴구처럼 튀어나오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은 손글씨를 잘 쓰지 않으려 한다. 예전처럼 편지 쓰기도 거의 없고 메모하는 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알림장도 e알리미로 대체되어 알림장도 쓰지 않는다. 모든 생각을 핸드폰을 통해 전하기 때문에 손글씨 쓸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고등학교에서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악필로 아이들의 손글씨가 무너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아무리 첨단기술로 무장을 해도 초등시기에는 아날로그식 학습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교육관이다. 이런 나의 교육관은 매달 학부모들에게 안내문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지지해 주지만 학생들은 아무리 필사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얘기를 해주어도 귀찮고 힘든 숙제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다 최근 내가 밤마다 필사를 하다가, 선생님마저도 필사가 도움이 되고 좋아서 쓴다며 그동안 필사한 노트를 보여주었다. 쓸 때마다 날짜를 썼기 때문에 아이들도 쉽게 쓴 분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얘들아, 선생님도 요즘 밤마다 30분씩 필사를 해. 해보니까 시간도 많이 안 걸리더라고.”

“...”

역시 별다른 반응이 없다, 흔한 어른들의 훈계로만 받아들이는 듯했다.

“자, 이거 봐. 선생님이 밤마다 쓴 걸 보여 줄게.”

“네?”

하던 공부를 멈추고 내가 썼다는 필사를 보기 위해 내 책상 주위로 몰려왔다.

“자, 매일 밤 30분씩 썼더니 이렇게 많이 썼단다.”

“정말이요?”

마치 자신들만 ‘쓰기 고생’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너희도 아예 금요일마다 30분씩 타이머를 정해놓고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다 같이 써볼까?”

“네~”

“좋아요~”     

아이들의 신나는 목소리를 듣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도 너희와 함께 같은 기사를 똑같이 써 볼게”

“와~ 좋아요!”

“앗싸~”

“네, 네!”

이제는 무슨 대단한 승리라도 한 듯 아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이날은 다른 날보다 필사 분량이 좀 많았다. 보통 200자 기준 5매를 쓰다가 기사가 좀 길어 10매를 써야 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나도 자신들과 함께 같은 걸 쓰겠다고 하니 환호했다.     


타이머를 29분 59초로 설정했다. 다 같이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부할 때나 혼자서 원고지 필사를 할 때 5분에서 10분 이상을 집중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30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온전히 필사에만 집중했다. 다들 너무 집중하여 익숙하지 않던 정막이 흐르자 순간적으로 당황하기도 했다.


그리고 타이머의 종료 알람이 울리자 아이들이 시간이 너무 금방 지났다며 아쉬워했다. 일부 학생은 좀 더 쓰자는 학생도 있었다. 각자 따로따로 쓸 때는 힘들고 귀찮은 훈련이고 숙제였는데 다 함께 하니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여 그다음 주부터는 매주 금요일마다 20분씩 타이머로 시간을 정하고 함께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 10분이 줄어든 20분 쓰기를 할 때에도 역시 아이들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정성껏 썼다. 다만 시간이 너무 짧다며 시간을 늘리자고 하여 5분 더 쓰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아이들 필사를 시키면서 왜 한 번도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동안 이 공부방을 거쳐간 많은 학생들이 좀 더 즐겁게 쓰지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 미안함마저 들기도 했다.       


이제, 금요일에 하는 놀이가 한 가지 더 늘었다, 하나는 월요일부터 요일까지 읽은 신문기사 내용에 대한 퀴즈를 푸는 시간이고 또 하나는 다 함께 신문기사를 필사하는 시간이다. 귀찮은 숙제가 놀이가 되었다.


놀이가 되면 공부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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