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날 때 배를 떨어뜨리는 시대

by 퍼퓸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딸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 시장에 갔다. 토요일이라 쉬는 매장이 많아 사야 할 물건은 사지 못한 채 식사라도 하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이왕이면 맛집에서 먹기 위해 티브이에도 나온 유명한 식당을 스마트폰 지도를 따라 찾아갔는데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어 우리만 식사하게 되었다. 역시 맛집다운 훌륭한 맛과 저렴한 가격에 감동하면서 만족스럽게 식사하던 차였다. 다른 손님들이 없어 딸과 나의 목소리만 크게 들릴 것 같아 조용히 식사하는데 오히려 일하시는 분들의 목소리가 커서 대화 내용이 또렷하게 들렸다. 자연스레 나와 딸은 못 들은 척 식사하면서 그분들의 얘기를 남김없이 듣게 되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 얘기부터 시작하여 서울 도심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러브버그로 이어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장마에 관한 내용이었다. 장마로 인한 수해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먼 나라 인도에서는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개선하거나 고친다고 말을 계속하면서도 절대로 고치지 않는다는 인도 국민성에 관한 소식까지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분들 역시 어디서 들으셨는지 ‘역대급 장마’에 대한 소문으로 대화의 주제가 모아졌다.


사실 ‘역대급 장마’라는 말을 식당에서 처음 들어서 다가올 장마에 대한 걱정으로 놀란 것은 아니다. 올봄부터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날씨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빠짐없이 등장하던 대화 주제가 ‘역대급 장마’ 소식, 아니 소문이었다. 마치 소문에 발이 달려 나의 뒤를 밟아 기다렸다는 듯이 낯선 곳 낯선 이들로부터도 ‘역대급 장마’라는 말을 듣게 된 상황 자체가 놀라웠다.


시장이란 곳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이면서 말도 주고받아 소식이나 소문도 모이는 곳이다. 그러니 나와 딸이 남대문 시장 한복판에 있는 맛집에서 ‘역대급 장마’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동안 모인 ‘역대급 장마’에 대한 여러 퍼즐 조각 때문이다.


‘역대급 장마’에 대한 소문은 지금부터 두 달 전 4월,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부터였다. 봄비 얘기를 하다 지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올여름 비가 많이 내린다는 얘길 들었다. 그냥 ‘많이’도 아니고 ‘역대급’으로 비가 내려 여름 동안 2~3일 빼고 계속 비가 온다는 얘기였다.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을 만나도 온라인 매체를 통해서도 ‘역대급 비소식’을 역대급으로 많이 접했다.


기상청 자료를 찾아 6월 3주 차까지 비가 내리는 날을 확인해 보면 아직 ‘역대급’과는 거리가 멀다. 본격적인 여름은 7월부터이고 장마 또한 6월 말에서 7월에 걸쳐 발생하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다.


아침 일찍 딸을 만나러 가느라 읽지 못한 신문을 저녁에 집에 와서 펼쳐 보게 되었다. 전면 광고에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역대급 장마, 전국이 ◯◯◯◯◯ 제습기의 영향권에 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기사의 카피를 읽으니 며칠 전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170여 년간 레인부츠를 생산해 오던 영국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헌터부츠사가 파산했다는 기사다. 이 기사를 읽으니 올봄부터 최근까지 여기저기 눈에 띄던 헌터부츠 광고와 사진들이 떠올랐다. 꽃샘추위가 한 창이던 봄인데도 여러 온라인 매체에서는 레인부츠 광고가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후 비 내리는 날마다 사람들을 살펴보면 레인부츠를 신은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온라인 매체 속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레인부츠를 신고 있었다.


혼자 그동안 모은 여러 퍼즐 조각을 맞춰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2019년 헌터부츠사의 레인부츠가 정식으로 수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레인부츠를 생산하던 헌터부츠 본사는 2019년도부터 경영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공급망 문제, 브렉시트, 인플레이션, 이상고온 등의 원인에 장기간의 코로나 사태가 복합적으로 맞물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2019년부터 수입했었기에 본사 못지않게 브렉시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이유로 매출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마침 코로나 팬데믹도 어느 정도 진정되는 분위기에 한여름 반짝 팔릴 수밖에 없는 레인부츠의 매출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마케팅 전략을 세웠으리라 생각한다.


영국 헌터부츠사가 파산을 발표하기 직전까지 한국의 헌터부츠 수입사는 헌터부츠 본사의 파산에 대한 징후를 전혀 알지 못했을까? 내가 수입업자라면 본사의 여러 동향에 대해 수시로 확인했을 것 같다.


기상청 자료를 찾아보면 올해의 6~9월의 강수량이나 기온 등이 예년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지만 여기저기 광고뿐 아니라 신문 기사에서는 ‘역대급 장마’라는 문구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 아니라 까마귀 날 때 배를 떨어뜨리는 형국이다.


다음 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대급 장마’의 피해가 없길 바라며 ‘역대급 장마’의 진실이 역대급으로 궁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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