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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Jul 24. 2023

필독의 이유

<읽거나 말거나>를 또 읽는 이유는


     

폴란드 시인이며 노벨상문학상을 수상한 쉼보르스카의 저서 <읽거나 말거나>는 그가 신문에 기고한 여러 서평을 묶은 책이다. 원제목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읽거나 말거나>가 아닌 폴란드어로 < Wszystkie lektury nadobowiazkowe>이다. 우리나라 말로 그대로 풀이하자면 ‘모든 비필독 도서’란 의미이다. 꼭 읽어볼 책이 아닌 안 읽어도 되는 책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에 소개된 <읽거나 말거나>란 제목이 원제목보다 더 찰떡처럼 들어맞는 것 같다.


원저에 있는 572개의 서평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이해하기 쉬운 162편을 선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뭐니 뭐니 해도 쉼보르스카의 솔직하고도 독특한 관점이다. 그녀의 꾸밈없는 직설적인 표현을 읽고 있자면 아는 정보가 없는 책에 대해서도 그녀의 평을 신뢰하고 싶어 진다.      


책들은 거의 대부분 실용서들이다. 감수성이라고 하면 지지 않을 시인이 문학서적도 아닌 실용서를 읽고 서평을 썼으니 그녀의 자유롭고 방대한 독서 생활을 엿보는 즐거움도 함께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소화하기에는 가볍지만 자양분이 많지는 않다. 거대한 숫자들은 익숙해지기 힘들 뿐 아니라, 일상의 자연스러운 대화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 이레나 란다우 <통계적인 폴란드인>에 대한 서평 p. 48~49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일정한 형태의 구문構文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꿈속의 불가사의한 혼란을 정리하고, 합리화하고, 수정하게 된다. 진술의 정확성은 우리가 어떤 어휘들을 사용하는지에 좌우되기 마련이며, 심지어 우리가 속한 문화권의 문학적 전통으로부터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중략)

꾸어진 꿈과 진술된 꿈이 아무 의혹도 없이 같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책에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내기가 살짝 망설여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꿈을 꿀까, 카를 구스타프 융 <꿈의 본질에 관하여>에 대한 서평, p. 290~291     


다들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하지 못한 상황에서 솔직하게 외친 아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직설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해 볼 이유가 된다.      


서평 목차를 훑어보다가 놀랍고 반가웠던 제목은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로 번역된 <춘향전>과 나관중의 <삼국지>다. 먼 나라 폴란드의 저명한 시인이 이 책들을 읽었다는 사실에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친근감도 잠시, 그의 평은 우리네들이 느끼는 그런 감상은 아니다. 애당초 비필독서에 분류된 책이니 좋은 평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어쩌면 교과서나 교훈을 담은 서적을 통해 어릴 적부터 세뇌되다시피 한 작품들에 대해 이제야 온전히 다른 평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극히 당연한 느낌이 아니라 다른 이면을 보여주니 이 또한 그녀의 서평이 흥미로운 이유다.      


“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춘향의 발꿈치뼈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잘 붙었을까. 안심해도 좋다. 완벽하게 잘 아물었을 것이다. 춘향은 잘 생긴 배우자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지도 않았을 테고, 원앙이 수놓은 이불을 덮어 자신의 뒤틀린 두 발을 애써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동화는 결코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는 법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틈만 나면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든다.”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글을 혼자서만 읽으면 한 쪽면만 바라보게 된다. 훌륭한 서평은 일반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기에 확실히 쉼보르스카의 글은 우리들에게 서평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우리는 서평을 읽을 때 함께하는 ‘공감’을 원하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길 바라기도 한다.      


삼국지 또한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찬사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섬세한 묘사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히는 상황을 신랄하게 들려준다.     


“각 페이지마다 위와 비슷한 사례가 반복된다. 게다가 일부 주인공들의 이름을 책 속에서 때때로 이렇게 표기했다가 때로는 저렇게 표기하는 등,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제대로 완독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애로사항이 독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중략)

하지만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현 상태를 고수한다면. 이 소설은 영원히 판독불가능한 책이 될 것이다, 확신컨대 이 책을 끝까지 꼼꼼하게 읽은 사람은 편집자들밖에 없을 듯하다. 1만 부나 되는 초판을 찍어 놓고, 고작 두 세명이라니.... 터무니없이 적은 인원이 아닌가.”     


우리가 흔히 러시아 작가의 작품 특히 도스또예프스키의 글을 읽을 때 겪는 당혹스러움을 동양의 고전 <삼국지>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시인도 느꼈다고 하니 동병상련한 사이처럼 끌린다. 삼국지에 대한 평이 그녀만의 독특한 시각인지 아님 서구인들이 보는 일반적인 시각인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동양인들이 느껴보지 못한 다른 정서임에는 틀림없다.       


그 외의 책들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해 읽기 어려운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내가 들어본 책들에 대한 서평을 먼저 읽고 그다음으로는 내용을 몰라도 이름이라도 익히 아는 작가의 서평을 중심으로 읽었다.


세상의 모든 책이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내용에 대한 어떤 반감反感에 공감하고 싶으면 그녀의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를 펼친다. 그녀의 글은 당당하다. 솔직함이 나의 독서에 위로가 되니 책에 실리지 않은 나머지 서평도 언젠가  읽어 볼 수 있길 바란다.          


P.S. 춘향전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평을 얘기했다가 남편으로부터 일장연설을 들었다.

예술은 예술일 뿐인데 그 예술을 해체해서 무엇을 얻겠냐. 춘향전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평을

마치 황금알을 낳는 닭 이야기에 비유했다. 중요한 것은 황금알인데 괜히 황금알을 낳는 닭을 해부해서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술을 예술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평이라고 일갈했다. 현실을 투영하되 은유와 상징 그리고 인간의 꿈을 반영하는 것이 예술인 것인데, 정작 중요한 흐름이나 내용과 관계없는 부분을 꼬투리 잡아 비판하는 그녀의 서평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다는 비판을 내가 대신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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