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10대 후반, <무소유>를 비롯하여 법정 스님의 여러 책을 즐겨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 세월이 흐르면서 다 잊었지만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당시 법정 스님께는 출가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출가하겠다고 찾아와도 밤에 찾아온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주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밤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밤에 하는 생각은 즉흥적이기 쉽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많이 좌우되어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밤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며칠 더 자고 나서 아침이나 낮에 오라고 했는데, 당시 밤에 찾아왔던 대부분 사람들이 그 이후로는 아침이나 낮에도 출가하겠다고 찾아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밤을 사랑했었다. 밤에 라디오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남김없이 적었다.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각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즉석에서 수정도 하지 않고 기록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습관적으로 쓰다 못해 쓰는 것 자체에 집착했던 것 같다. 쓰지 않은 생각들이 바닥에 떨어진 구슬처럼 어디론가 가속도가 붙어 굴러가 버릴 것 같아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어 담기 급급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차곡차곡 부피와 무게를 가진 물질이 되어갔다.
스님의 그 일화를 읽고 나서 당시 나의 글들을 읽어 보니 오밤중 갑작스레 출가라도 하겠다고 결심한 그 누군가의 마음처럼 즉흥적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아침이나 낮에 다시 읽고 고쳐 써보게~”라고 어디선가 스님께서 말씀하실 것 같았다. 아무도 몰래 내 마음 내 생각을 혼자 읽는데도 난롯불에 덴 듯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따가웠다.
게다가 그때는 스님의 글뿐만 아니라 에리히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글을 읽고 한창 고무되던 시기였다. 소유하는 삶을 버리고 존재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으니 중학교 시절부터 써왔던 일기장이 오글거리고 한편으로는 짐스러웠다. 아무리 꼭꼭 숨겨 두어도 누군가가 볼지도 모른다는 것도 부담이라 그 일기장들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버리려다가도 갑작스러운 그 짐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마음을 조였다.
스물셋이 되던 추운 겨울날 나의 마음을 짓누르던 일기장 수십 권을 여러 가방에 나누어 담아 지금의 남편인 남자 친구와 함께 부산행 기차를 탔다. 한겨울이라 해운대 해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은 해변 구석에 모래를 파 구덩이를 만들고 일기장 더미를 쌓았다. 라이터 불을 붙였다. 매서운 바람에 표지가 단단하게 코팅된 일기장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표지 안쪽의 종이를 뜯어 먼저 불을 붙여 불쏘시개처럼 사용하여 태우기 시작했다. 불길이 커지자 멀리서 해안을 지키는 경비 아저씨께서 달려오셨다. 해변에서 이렇게 함부로 불을 피우면 안 되니 어서 끄라는 말에 놀라서 허둥지둥 반쯤 타다 만 것들을 겨우 옮겨 근처 해변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버렸다. 완전히 다 태우고 싶었지만 4절 크기의 가방 3개나 되는 많은 양을 다 태우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 더미에 숨겼다. 그리고 그 일기장들이 바람을 타고 나를 쫓아오기라도 할까 두려워 도망치듯 해운대를 빠져나왔다.
나의 모든 부끄러움과 오글거림이 부산 바닷바람에 멀리 날아가버린 것처럼 시원했다. 그렇게 밤의 생각들이 낮의 불과 모래, 바다로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간혹 책을 읽다 좋은 글귀가 있으면 필사 정도만 할 뿐이었다. 생각의 흔적들을 남기는 것이 영 불편했다.
왜 그리도 부끄러워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에 과민했던 것 같다. 밤의 나는 밤의 나대로 낮의 나는 낮의 나대로 그렇게 인정하면 될 터인데 유독 밤의 생각들을 과도하게 부정하려 했다. 아니 낮의 나를 밤의 나가 불편해하고 밤의 나를 낮의 나가 불편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 50대에 이르니 밤과 낮의 나를 어느 정도는 공평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밤의 나가 낮의 나처럼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낮 동안 증발된 물기를 다 머금은 것처럼 밤의 달은 촉촉하고 나의 마음 역시 달빛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최근 이런 마음이 유난해지는 시간에 필사를 하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좋은 글귀를 보면 습관적으로 한 번씩 써보았기에 필사 자체가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밤마다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글을 필사해 보기는 처음이다. 매일 밤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씩 필사를 해보니 밤 시간이 달라졌다.
필사는 충분한 시간도 있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지만 오히려 부족한 시간 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도 가능하다. 짧은 시간이라도 여러 상념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마음의 중심을 붙잡는데 도움이 된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면서 마치 내 안의 잡념을 빗자루질하듯 조심스럽게 쓸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생각들을 비워내면 그제야 다시 나를 살 수 있게 하는 것들로 채울 수가 있다. 그릇을 비워야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듯 내게 필사하는 밤은 잡념을 비워내는 시간이다. 필사하는 시간에는 밤의 생각들을 조심하지 않아도 되고 불편해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