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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Feb 07. 2023

헤살꾼주의보 2

- 스포주의, 사진 주의( 사진 많음 주의), 영상 소리 주의, 혐오사진 주의, 더러움 주의, 글밥 많음 주의(긴 글 주의, 긴 내용 주의), 벌레사진 주의,  심약 주의...


- 못생김 주의, 예쁨 주의, 속 터짐 주의, 자랑 글 주의, 후방 주의,  배 아픔 주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상에서는 제목 옆에 각종 ‘~주의’가 표기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무시하고 수동적으로 화면을 따라 글을 읽거나 화면을 보다가 원치 않는 장면이나 소리, 글 등을 접하게 되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곤 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원치 않는 정보도 뜻하지 않게 접할 가능성이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면 될 것 같지만 원치 않는 정보는 파도처럼 갑자기 밀려오기 때문에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늘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이들끼리 서로에 대한 배려로 시작된 것이 “~주의”이다. 상황에 따라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은 첫 번째 예처럼 정보를 접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의 뜻을 담고 있지만 일부는 장난기 가득한 “~주의”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주의’ 중 제일 먼저 사용된 말이 ‘스포주의’가 아닌가 싶다.      


영화 감상글이나 영화평에서 줄거리 노출이 심해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결말까지 핵심 내용이나 작품 전체 내용을 다 소개해 주기도 하는데 빠른 시간 안에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할 때는 나름 유익해 보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의 시각도 개입되지 않은 온전한 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이 해당 정보를 접하면 김 빠진 맥주를 마시는 것 같으리라. 하지만 이 또한 개인적인 성향인지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원하는 정보를 선택하면 된다. 이럴 때 ‘스포주의’라는 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글이나 영화의 결말이나 부분적인 내용이라도 원치 않으면 제목에서 ‘스포주의’라는 말을 반드시 확인하여 걸러내야 한다. 이 말이 갖는 경고를 무시하고 감상글이나 평을 봤다가는 뜻하지 않게 줄거리를 알게 되어 ‘spoil’의 의미 그대로 모든 것을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헌책을 읽다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니 ‘스포주의’라는 단어의 역할이 인터넷상에서 상당히 유용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스포일’이라는 말을 우리말로는 무엇이라 부르는지 궁금했다. 영어사전에는 spoil은 ‘망치다’, ‘spoiler’는 ‘망치는 사람’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주의’에 결합되는 말들이 대부분 우리말인데 반해 유독 ‘스포주의’는 영어의 음을 그대로 써서 사용한다. 그러니 국어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국립국어원의 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2005년 11월 국립국어원은 함부로 쓰이는 외래어와 외국어를 걸러 내고, 우리말을 더 다듬어 가꾸기 위하여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운동은 2004년 7월 5일부터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 듬기(www.malteo.net)’ 사이트를 마련하여 운영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국립국어원이 다듬어 써야 할 외래어와 외국어를 매주 하나씩 선정하여 발표하면 일반 국민이 그 말을 대신할 우리말을 자유롭게 제안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2005년 9월 초부터 11월 말 현재까지 이 사이트를 통하여 일반 국민이 직접 다듬은 말은 다음과 같다.”
                                                           국립국어원소식 2005년 11월 2일 자


지금은 2023년. 만으로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 입에는 자연스럽지 않다. 위 표를 보면, 2005년에 다듬어져 발표된 단어 중 현재 제대로 쓰이고 있는 우리말은 없는 듯하다. 나 역시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영화 헤살꾼’이라는 말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글을 사랑하는 블로거나 신문 논설위원들의 글에서 ‘영화 헤살꾼’에 대한 소개가 간간이 소개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그들만의 공간에서만 사용되었을 뿐이니 아무리 세상 빠른 인터넷 현실에서도 주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개그맨들이 사용하는 심박한 단어들은 단 몇 개월 만에 심지어 단 몇 주 만에도 대국민 유행어가 되기도 하는데 1~2년도 아니고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알려지지 않는 것에는 국립국어원의 발표 외에 다른 노력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포일러, spoiler’는 ‘영화 헤살꾼’이라 결정되었지만, 막상 한영사전에서 헤살꾼을 찾아보면 ‘an obstructionist : 의사 방해자 또는 ‘marplot : 쓸데없이 참견하여 계획을 망쳐놓는 사람, 헤살꾼이라는 단어로 표기되어 있다. 사전에서의 의미 꼬리물기를 알고 있었음에도 사전만으로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매번 이게 뭔 상황인가 싶다.


게다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헤살’이라는 말보다는 ‘방해’, ‘훼방’이라는 말에 더 익숙하다. 뜻이 비슷한 말 여러 낱말 중 가장 익숙하지 않은 말로 정했으니 ‘헤살꾼’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쉽게 붙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언어라는 것이 한 개인의 결정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지만 개인 한 명 한 명의 변화가 모이면 결국 변화가 찾아온다.


이 글을 쓰면서 ‘헤살꾼’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내 언어생활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헤살’이라는 말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헤..”, “헤.. 뭐였더라?”라며 매번 인터넷과 사전, 메모지를 찾아보고 나서, 그제야 ‘아, 헤살, 맞다...’라고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매번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내 기억 속에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남편의 기억에도 ‘헤살’이라는 말을 주입하기 위해 남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헤살...”, “헤살꾼...”이라 중얼거리고 남편의 일에 헤살 놓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우리말 지킴이’의 반대말이 ‘우리말 헤살꾼’이라고 한다. 짜장면을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이라고 당당하게 글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영한사전에도 ‘spoil’이라는 단어의 우리말 의미로 ‘헤살 놓다’라고 표기가 되고 각종 매체의 글과 영상에 ‘스포주의’가 아닌 ‘헤살꾼주의’라는 말이 등장하길 기다려 본다.     


“헌책을 구입할 때는 헤살꾼을 조심하시라”      

         


#헤살 #헤살꾼 #헤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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