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푸네스를 기억한다. 글 속 화자의 기억을 통해 푸네스를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푸네스에 대한 30여 년 전의 인상은 푸네스가 기억했던 방식이다. 그때 그 순간의 기억이다.
작년에 파리리뷰가 주목한 단편들을 모았다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라는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그 단편집 안에 보르헤스의 글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글을 실은 편집자의 관점이 궁금했다. 다른 누군가가 보르헤스의 글을 어떻게 읽었을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보르헤스의 글이 번역도 많이 되고 같은 소설의 다른 번역본도 자주 출간되는 등 보르헤스의 유명세에 걸맞게 다양한 출판물이 간행되고 있지만 내가 처음으로 보르헤스의 글을 접했던 1990년대에는 보르헤스에 대해 그리 알려진 바가 없었다.
1993년 경으로 기억한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책에 대한 정보라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알고 있었던 대학 동기로부터 보르헤스의 <허구들>이란 책을 처음 소개받았다.
내가 당시 구입한 책은 1992년 6월 2쇄 본이었다. 1992년 3월에 1쇄를 찍었는 데 바로 그 해 6월에 2쇄를 찍었으니 출간 당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것 같다.
남미 쪽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던 상태에서 접하게 된 <허구들>은 늘 안갯속에 존재했다. 뭔가 명확하지 않고 어둠 속 뿌연 안개를 손으로 헤쳐가며 길을 찾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같은 글인데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길로 가서 다른 목적지에 다다른 느낌을 받았다. 읽으면서도 내가 읽고 이해하는 내용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당시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보르헤스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을 계속 붙잡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현상이 마치 소설로 구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잠깐 우표를 수집하던 적이 있었다. 우표를 직접 구입한 것은 아니고 어쩌다 배달되는 우편물에 붙은 우표의 그림이 맘에 들어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내 기억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때 모았던 우표보다는 우표를 보관하기 위해 구입했던 우표수집책이었다. 당시 동네 문방구에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평범한 우표수집책이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겉표지의 인상은 생생하다.
표지에는 옅은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우표수집책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그 아이들이 바라보는 우표수집책 역시 자신들이 그려져 있는 동일한 우표수집책이다. 내가 들고 있는 우표수집책 표지에 그려진 아이들은 내가 들고 있는 우표수집책과 동일한 우표수집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우표수집책 속의 그림은 그림 속으로 끝없이 이어졌는데, 나는 그 표지의 그림을 생각으로 따라갈 때마다 그 유한한 공간에 나타난 그 무한함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무한’은 가끔 커다란 거울 앞에서 또 다른 거울을 마주 보고 비추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 거울이 다시 거울을 비추며 무한히 연결되는 모습과 우표 수집책의 그림 모두 단순한 2차원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펼쳐지는 무한성에 3차원의 공간이 보이고 다시 3차원 공간에서 마치 4차원 공간이 생겨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날 때면 2차원 평면에 나타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성의 경이로움에 전율을 느끼곤 한다.
보르헤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우표수집책의 표지와 거울과 거울이 마주 보는 세계, 그 이상을 뛰어넘는 허구의 세계를 놀라운 언어로 구현하였다. 그가 만든 세계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 들어서면 복잡한 형태의 미로 속 같아 쉽게 길을 잃게 된다.
보르헤스의 <허구들>을 읽고 나서는 보르헤스 관련 출판물을 되도록 다 구해서 읽어 보고 있다. 특히 그의 소설 <허구들>은 도서출판 녹진에서 1992년 출간한 박병규 번역본과 함께 다른 번역본들을 비교하면서 읽는다. 심지어 그가 말년에 자신의 기억력에 의지하여 가려 뽑은 <바벨의 도서관> 책 시리즈도 그의 선택에 탄복하며 읽곤 한다.
보르헤스는 죽었고 그의 글은 마치 종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글을 읽는 것은 늘 진행형이다. 그의 또 다른 단편 <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에서 추이펀의 소설이 “몇 개의 미래들, 즉 몇 개의 시간들을 ‘창조하고’, 그것들은 증식하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듯이 우리가 그의 글을 읽어나가는 것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두 갈래 길을 지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결코 같은 길을 갈 수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수형도 같은 길을 나아가는 것과 같다. 오직 기억의 명수 푸네스만이 모든 시간 속 모든 길을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푸네스를 기억하고 보르헤스를 기억하는 나를 누가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