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회견 발표
매일매일이 같은 날들로 반복되던 어느 날
아들이 품고 있던 핵폭탄을 터트리듯 깜짝 선언을 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이 결정되면서 출근 전까지
꿈같은 두 달여의 시간이 주어진다.
대학을 졸업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느라
한 번도 쉰 적 없이 바쁘게 살아온 아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랜만에 휴가를 즐기기 위해
집으로 와 머물기로 한다.
두 달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의 숫자에 불과하지만 내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떨어져 지내 마음 한편이 늘 아련하고 아쉽기만 했던 아들이 집에 와 있는 동안만이라도
무기한으로 미뤄졌던 보상을 받듯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 보고 싶어 진다.
철이 들고 독립 한 이후로 잠깐씩 다니러 왔다 간 것 빼면
아들도, 나에게도 10년이 넘도록 허락되지 않던 시간이다.
선물처럼 찾아온 이 귀한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일 수도 있으니 뭔가 뜻있는 걸 남기는 것도 좋고,
지금껏 만들어놓지 못했던 추억을 이제부터 라도 조금씩 쌓아 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혼자 지내느라 제대로 챙겨 먹었을 리도 없고,
편리함 때문에 주로 인스턴트식품만 먹었을 아이에게 엄마표 집밥을 먹이고 싶어
이것저것 좋아하던 음식을 준비하면서 아들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아들과 나는 둘만 남아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는다.
먹는 모습만 봐도 좋은 엄마 마음으로 어린아이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식사를 마치면
그동안 도시에만 있었으니 눈에 초록 초록한 색을 봐줘야 한다는 핑계로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나갈 궁리부터 한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는 아들
혼자 신나 소풍이라도 가듯 김밥을 싸고, 맛있는 간식도 챙긴다.
아들이 운전해 주는 차 옆자리에 앉아 바깥 풍경대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을 장착한 채
무심한 표정의 아들만 보면서 아이처럼 마냥 좋아라 한다.
이런 딱한 짝사랑 어디 또 있을까?
산으로 가서 하이킹도 하고, 장 보러도 다니고,
가끔은 몰에 가서 아이쇼핑(window shopping)도 하고,
TV도 보면서 스쳐 지나가는 시간들을 따라 우리도 함께 흘러간다.
축복으로 받은 시간 안에서 별로 다를 것 없는 똑같은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들이 지루함을 한방에 날려버릴 충격적인 폭탄선언을 한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기자회견을 하듯 우리를 앉혀놓고는
결혼을 하겠다고 공식발표를 하는 것이다.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굳은 의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일종의 결의(決意)에 찬 선포(宣布)다.
이번에도 역시 아들은 계획이 다 있었다.
많은 날들을 아들에 대한 외사랑으로 홀로 아파하고, 서운해하기도 했지만
커플링을 처음 보는 순간 그리고 곧바로 그녀와의 어색한 만남을 통해
결혼은 수순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런 일련의 일들로 알게 모르게 마음에 박힌 굳은살로
심한 동요는 살짝 완화해 주고 있지만
당황스러운 마음까지야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슴푸레 헤아리고 있었다지만 요즘은 결혼을 늦게 하는 추세라
당장 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들 입에서 직접 결혼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 막막해 초연(超然)해 지지가 않는다.
상대팀의 선수가 자신의 공을 홈런으로 날려 벙찌고 허탈해진 투수처럼
뜻밖의 놀라운 발언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아들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기 앞길 찾아가 저 할 일 스스로 척척 잘 해내고,
사랑하는 사람 만나 연애까지 알아서 잘 해내는 아들이
직업이 없어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격이 덜 갖춰져 책임지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니
사실 걱정 할 것은 없다.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장거리 연애라는 고단수(高段數)의 장애물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절대 흔들릴 리 없다는 서로의 찰떡같은 믿음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이상무(異常無)이고,
남, 녀 주인공답게 고무신과 워커(軍靴)도 거꾸로가 아닌 제대로 신고 똑바로 서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든 아들의 결혼을 미룰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냥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좀 더 우리 곁에 오래 머물 것이라는 야무진 착각과
그랬으면 하는 욕심인게지.
뱃속의 탯줄로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간당간당하게 엮여있던 아들과의 끈이
스르륵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있는 힘을 다해 잡아보지만 점점 기운이 빠져 간다.
아이들의 나이와 연애기간이 장기화되는 것에 대한 여자 친구 부모님의 염려도 한 몫한다.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던 드라마 줄거리의 흐름이 버티기 조차 힘들어진 우리를 자꾸 벼랑 끝으로 떠민다.
가속이 붙어 버린 탓으로 브레이크가 먹지 않아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아들은 상견례까지 제안하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불도저의 강한 추진력에 그대로 밀려 버린 우리는
양가의 합의하에 그들의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이어 초고속 진행으로 결혼까지는 이제 4개월 남짓 남은 듯하다.
집으로 올 때 그는 다 계획이 있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우리는
어퍼컷으로 턱을 한대 퍽 얻어맞고 KO 펀치를 당한 듯 맥을 추릴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결혼식이야 치러지겠지만
지금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이 와중에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결혼준비 보다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