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그녀와의 어색한 첫 만남

커플링의 여주인공 드디어 등장하다

by 스몰토크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공식 언급한 이후로 그녀가 가끔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우리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카메라 앵글은 계속 주연인 남녀 배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아직 베일에 가려진 그녀를 본 적 없는 우리는 그저 다음 장면이 궁금하기만 하다.


이번 여름엔 연로하신 부모님도 뵙고 겸사겸사 2주 동안 아들과 따로 또 같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동생들이 옆에 있음에도 한국에 없으니 항상 빈자리로 남아있는 큰딸이 눈에 밟히는지

전화하면 "큰애야! 언제 오니? 난 네가 보고 싶어! 엄마 안 보고 싶어?"

아직도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외치는 엄마의 바람대로 자주 가서 봬야 하는 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녹녹지가 않아 그럴 수가 없다.


부모님 나이의 숫자가 자꾸 시간을 재촉하는 듯해

갈 때는 부모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떠난다.


그래놓고 주어진 일정 안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되다 보니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볼 일도 봐야 해서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느라

정작 부모님과 같이 있는 시간은 별로인 채로 그냥 돌아오곤 한다.


늘 그렇듯 이번에는 꼭~

결의를 다짐하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찬 바람이 살에 닿으면 뼛속까지 아파와 여름에도 반팔을 입지 못하는 내가

35도를 웃도는 덥고 습한 날씨에 녹다운된 듯 공항에 내려서부터 숨이 막힌다.


2주면 사실 긴 시간은 아니다.

머무는 시간이 한정되다 보니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계획에 딱딱 맞춰 움직여 줘야 한다.


엄마가 한국에 있는 동안 무언가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아들이

호시탐탐 (虎視眈眈) 기회만 엿보다가

이때를 놓칠 순 없다

여자 친구를 만나 줄 것을 제안해 온다.

아들! 너는 역시 계획이 다 있었구나!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도 하고, 어떤 아이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아들의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보기로 한다.


어쩌면 장래에 며느리가 될 수도 있는 아이를 만나는 중차대한 자리에

남편은 같이 안 왔으니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먼저 봐야 하는 상황이다.

아들이 누군가를 소개하는 것도, 만나보는 것도 처음이라 설렘보다는 조금 부담스러운가 보다.

내가 인사드리러 가는 것도 아닌데 만나기 며칠 전부터 이 생소한 만남이 괜히 긴장된다.


내가 떠나올 때와는 다르게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이 이젠 많이 낯설다.

전철 노선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촌사람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타야 할 판이다.

결국 한 정거장전에 내려 다시 타고 오느라고 약속시간 보다 조금 늦어 버렸다.


서둘러 전철역의 높은 층계를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올라가니

그 끝에 기대고 서있는 아들이 살짝 보인다.

원래 길치라 길을 잘 못 찾아 아들이 걱정 돼서 날 데리러 온 모양이다.


아들의 여자친구와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인데 늦은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약간의 호들갑을 섞어 멍청하게 미리 내려서 어쩌고 저쩌고를 변명하듯이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검은 원피스를 입은 낯선 여자가 웃는다.

지나가던 이 인 줄 알았는데 내게 인사를 한다.


순간 흐르던 땀이 쏴악 마르면서 주변이 잠깐 멈추는 듯하다.


아들의 그녀였다.

아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허락 없이 훔쳐가 버린,

바로 그 반짝이던 커플링의 여주인공.


그것도 모르고 주저리주저리 스스로 길도 못 찾는 모지리였다고 떠들고 있었다.

창피함은 온전히 나의 몫인가?

첫인상으로 보여준 엄마 체면이 영!... 제대로 구겨졌다.

그렇게 어색하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아들이 진두지휘(陣頭指揮)하듯 앞서고, 나는 쫄래쫄래 그 뒤를 따라 걷고,

그런 나를 엄호하듯 그녀가 말없이 뒤를 따른다.


아이들이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다는 한정식집에 도착하니

룸이 있는 방으로 종업원이 우리를 안내한다.

자리를 잡고 나서야 내 앞에 마주 앉은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녀는 참 예쁘다!


얼굴 자체도 아름답지만 유행의 흐름에 역행하듯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니 자연스러움이 돋보여 더 고와 보인다.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티가 폴폴 풍기고,

꾸밈없이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도 상큼해 보인다.


음식이 하나씩 서빙되면서 식사를 시작하고,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맛이 괜찮냐고 묻는다.

말로는 맛있다고 했지만 사실 이 상황에서 무슨 맛인지...


이 자리가 무척이나 쑥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요즈음 살이 쪄 날씬해 보이려고 검은색으로 입고 나왔다는

농(弄)을 던질 만큼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남자친구의 엄마 앞에서 보통은 어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잘 먹지도 못하고 그의 뒤에 숨어 얌전 떠느라 조용히 있을 텐데

우리 드라마의 여주(女主)인 그녀는 다르다.


원래 이런 자리는 분위기가 주는 무게감으로 엄청 부담스러울 텐데도

조잘조잘 아들의 칭찬까지 살짝씩 곁들여

내가 아들을 참 잘 키웠구나!

잠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우쭈쭈 기분 좋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주인공답게 많은 양의 대사(臺詞)를 관객이 배역에 녹아 빠져 들도록

맛깔나게 잘도 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소화해 낸다.

예의에 어긋나지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깍듯하기까지 하다.

그 옛날 나는 어땠었나? 잠깐 생각해 본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저희 끼리 핸드폰으로 근처 커피숍을 검색한 뒤 나를 안내한다.

아이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차를 마시고, 특별하지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사랑에 푹 빠져있는 한쌍의 커플을 바라본다.


요즘 아이들 답게 엄마가 보고 있어도 개념치 않고 둘이 손잡고서 꽁냥꽁냥 스스럼이 없다.

광고라도 찍듯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레이저를 뿅뿅 쏘아대며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아들, 그리 좋은가?


무엇보다 예민해서 스트레스도 잘 받고, 무심한듯한 아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저 싱글벙글하고 있는 걸 보니 둘은 꽤 잘 맞고, 잘 어울리는 듯하다.

명랑한 그녀가 옆에서 잘 맞춰주고, 그걸 또 좋단다 하는 아들을

앞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밥 먹고, 차 마시다 보니 시간이 꽤 된 듯하여 아들에게

"데려다주고 와" 했더니

"아니에요. 저는 익숙해서 혼자 잘 찾아갈 수 있어요.

오랜만에 한국에 오셔서 길도 잘 모르실 텐데 아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시면서 가세요.

저는 저기서 버스 타고 가면 돼요" 한다.


분명 내가 아까 전에 바보처럼 길을 헤매고 다닌 걸 알아서일 거야.

그렇다고 해도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했다.

배려 섞인 그 말 하나로 그녀의 따뜻한 마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런 경우 보통은 아들이 나보다는 그녀를 데려다주어야 하지 않을까?

집을 못 찾아가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고 난 후 저희들끼리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그녀보다는 차라리 내가 혼자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그녀는 아들을 양보해 준다.


한번 보고 얼마나 알 것이고 그녀의 속마음 까지야 어떻게 알겠냐만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여러 면으로 나를 헤아려주려는 어른 같은 그 마음씀이

꽤 기특하다.


반대의 성격끼리 만나야 부족한 점을 서로 채워 줄 수 있어서 덜 부딪힌다고 하니

조금 어두운 아들과 밝은 그녀는 딱 맞는 조합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서툴렀던 우리의 첫 만남은 이렇게 좋은 기억들을 남긴다.


전철을 타고 오면서 궁금했을 아들이 묻는다

"어때요?"

"참 밝아 보이더라. 생글생글 웃는 모습도 예쁘고.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자신감 넘치는 자연스러움이 몸에 베인 것 같아.

가식적이지 않아 보여 좋았어"


더 이상은 묻지도 답하지도 않고 우리는 말없이 앞만 응시한다.

나중에 그녀를 통해 들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여자친구를 엄마에게 선 보이던 그날

아들은 바들바들 떨었다고 한다.

그랬어 아들?


아들이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둘은 계속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대학시절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입영하는 애인을

눈물 철철 흘리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내놓고는

몇 날 며칠 울다가 처음에는 편지도 보내고, 답장도 기다리고 하다가

더 이상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인가 차라리 이별을 선택하고야 마는 친구들을 무수히 보아 왔다.


우리 때처럼 종이 편지가 아니면 연락이 불통이라 관계 지속이 어려울 수밖에 없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고 해도 자주 만날 수 없다는 큰 단점 때문에

롱디(long distance relationship)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들이 떨어져 있는 동안 군대를 가고 보내는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처럼

고무신과 워커(軍靴)를 거꾸로 신지 않고 끝까지 서로를 기다려 줄 수 있을지,

둘이 그 어려운 시간들을 잘 견뎌 내면서 사랑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서로 맞추려면 애로(隘路)도 많겠지만

요즘은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그나마 예전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화상통화도 가능하니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얼굴도 볼 수 있고

카톡이 있어 비싼 국제 전화 비용 부담 때문에 전화를 못할 일도 없다.


언제 어디서나 연락이 가능하니 옛날보다는 쉬울 듯 하지만

다 좋아졌다고 해도 헤어지는 연인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애틋할까?


귀찮고 번거로울 수도 있는데 엄마인 내가 보내줄 틈도 없이

서운 할 정도로 혼자 있는 아들을 위해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밀키트를 부지런히 챙겨 보내주고 있는 그 마음까지도 갸륵한

그녀가 지치지 말고 아들과 알콩달콩 예쁜 사랑을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아이들의 사랑에 오작교(烏鵲橋)라도 되어 주고 싶지만 그런 어설픈 도움 없이도

아들이 선택하고 아끼는 그녀이니까 사랑의 힘으로 롱디를 잘 극복해 끝까지

서로를 잘 지켜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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