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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예쁜 여자 Mar 07. 2024

죽음까지 배웅해 주는 친구

박찬욱감독의 어머님과 우리 엄마



우리 엄마를 얘기할 때 꼭 빼놓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어머님이다.



우리 엄마와 박찬욱 감독의 어머님과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으로 엄마와 가장 친한 둘도 없는 친구이다. 아니 이제는 ‘친했던’으로 바꿔야겠다.



두 분은 아주 대조적이다. 우리 엄마가 목소리도 크고 씩씩한 여장군 스타일이라면, 박감독의 어머님은 지적인 목소리에 야리야리 여성스러운 스타일이시다. 두 분 다 미인이고, 굉장한 멋쟁이라는 공통점은 있다.





항상 몸이 약했던 박감독의 어머님은 파주 헤이리를 떠나 양주시 외곽에 사는 우리 엄마 곁인 은평뉴타운으로 이사까지 오셨다. 씩씩한 우리 엄마는 눈이 안 좋은 친구의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고 매 번 병원에 데려가 주었고, 김장 때는 김치를 담아 갖다 주곤 했다.



항상 돌보아 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씩씩하던 우리 엄마가 갑자기 암 말기 판정받고 그렇게 먼저 가 버리셔, 가장 황당해하는 분이 바로 박감독의 어머님이다. 엄마가 하늘나라 가신 후에는 다시 자식 곁인 헤이리로 이사 가셨다.



우리의 인생은 그래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엄마가 2020년 8월, 암 말기 판정받기 바로 며칠 전에도 엄마는 씩씩하게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에서 열리는 박감독의 아버님 개인 전시회에 다녀왔었다.





흔히 좋은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나온다고 하는데, 박감독 부모님을 보면 설명이 된다.



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을 키워내신 아버님께 자랑스러운 무궁화를, 멋쟁이 어머님께는 장미를 정성껏 만들었고, 엄마는 신나서 들고 가셔서 화질은 좋지 않지만 사진도 열심히 찍어 오셨다.




내가 박감독의 어머님께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건, 엄마가 암 판정받은 날부터 하늘나라에 가시는 날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해 주신 것이다.



엄마는 가끔 의식이나 인지력이 흐려지는 섬망 상태에 돌입하려는 위기가 있었다. 박감독의 어머님은 매일 대답도 잘 못 해 반응도 없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해 한 시간 동안 혼자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며 정신줄을 놓지 않게 해 주었다.



그래서, 환자에겐 항상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그건 아마 친구가 누구보다 잘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으면, 요양보호사가 말벗이 되어 줄 수가 있다. 간병하는 사람의 큰 짐을 덜어 준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봐 온 박찬욱 감독 어머님은 내게도 엄마 같은 분이시다. 우리 엄마에 대해 상의할 일이 있으면 꼭 전화드려 여쭈어보곤 했다.


박감독 어머님은 아직도 나를 “ㅇㅇ씨”라고 부른다. 우리 엄마가 나를 낳고 너무 귀해 이름조차도 못 불렀다고 한다. 이름에 ‘씨’를 붙여 “ㅇㅇ씨”라고 부르게 했다고 한다. 엄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그렇게 불러주신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키우셨다. 지금도 생각하면 코가 찡해진다.



내가 공예가가 되고 우리 엄마만큼 기뻐해주신 분도 박감독의 부모님이다. 화가이신 박감독 아버님은 예술가의 길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전공도 안 한 내가 국전에서 두 번이나 입상한 것을 언제나 칭찬해 주신다.


불광동 서울혁신파크에서 서울여성공예대전이 열렸을 때는 두 분께서 오셔서 내가 1등이 확실하다며 엄마만큼 자랑스러워하셨다.





우리 엄마도 박찬욱 감독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성공한 지를 잘 알기에 그의 성공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다. 세 분은 꼭 같이 박감독의 영화 시사회에 빠짐없이 갔다.



엄마와 박감독 어머님은 그렇게 서로 유일하게 자식자랑을 맘껏 할 수 있는 그런 친구이기도 했다.





전화를 매일 해 주시던 또 한 분의 친구분이 계신다. 엄마 친구들 모임의 회장이셨는데, 지금도 엄마 생각이 날 때면, 떡을 좋아하는 내게 떡을 보내 주신다. 그 친구분은 내 공예 작품과도 인연이 깊다.



멋쟁이 우리 엄마가 모임에 내 작품을 하고 가면 모든 친구분들이 사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나는 저렴한 가격에 모두 드렸고, 그 친구분은 모임 때마다 모두의 돈을 모아 항상 예쁜 꽃봉투에 빳빳한 새 지폐로 채워 보내 주셨다.



내 작품의 은행, 단풍은 엄마 친구분들, 또 그분들의 친구들이 모두 다 싹쓸이해서 사셨다.





유난히 내 작품을 많이 샀던 멋쟁이 의사 친구분이 계시다. 동백꽃을 주문해 주셨는데, 동백꽃은 엄마도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그때 처음으로 동백꽃을 만들어 예쁘게 포장해서 보내 드렸는데, 아쉽게도 엄마한테는 동백꽃을 그 후 못 만들어 드렸다. 지금도 동백꽃을 보면 그때 예쁘다고 좋아하며 들고 가던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은 훨씬 더 예쁘게 만드는데 우리 엄마가 그걸 못 달아보고 하늘나라 가신 게 많이 아쉽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세 사람만이라도 마음으로 보내 주면 성공한 인생이라 하는데, 엄마가 돌아가실 때 통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도 사회활동을 많이 하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던 엄마였지만, 죽음으로 가는 길을 따뜻하게 배웅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위 세 친구분께서 따뜻하게 죽음까지 배웅해 주셨으니, 그래도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를 위해 따뜻하게 배웅해 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헤아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근데, 그때마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게 참 슬프다.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난 12월, 부산 송정 해수욕장 바다에서 엄마가 좋아하던 동백꽃을 놓고 사진을 찍으려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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