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외로웠고 정말로 혼자였던 시간들을 보낸 후 느낀 의외의 감정
나의 곁에 마음 맞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된다.
영양가 있는 만남이 아니라면 친구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예전에는 세월이, 추억이 우리들의 관계를 증명하고 더 단단하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세월은 그저 우연히 서로가 같은 시간대에 만나 그 시간을 보냈다는 것, 그 자체다.
이제는 세월보다는 '지금 우리의 만남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영양을 주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프랑스에 온 지 113일째 되는 날이었다. 4개월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점에 문득 깨달았다. 카페 안에서 시끄럽게 웃는 두 점원의 소리를 들으며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곳은 일본 만화가 가득한 만화방 겸 카페였는데 카페 공간에 있던 사람은 나 하나, 그리고 카운터에 두 명의 점원이 있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조용하게 집중할 수 없게 되자, 짜증이 났다.
그래, 짜증이 났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 그렇게 친구와 웃고 있던 나의 모습이.
곧이어 여태 내가 그러한 웃음을 아예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날 이후로 한국에서 있었듯이, 가까운 친구 한 명이 절실하구나를 느꼈다.
웃다가 배 아파서 배를 잡고 눈가는 촉촉해지고, 서로 "미쳤나 봐"하며
자연스레 상체를 숙이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한 명 말이다.
철저히 혼자여서 더욱이 주변인에게 약간의 경계를 풀지 않았던 상태에서 이제는 마음을 더 열어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나와 하루 차이로 같은 레지던스에 온 한국인 언니와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원래 폴 발레히라는 대학의 어학원에 다녔다가 여름 바캉스 기간 동안에는 꼬메디 광장(중심가)에 있는 학원을 등록했었는데, 원래 그곳에 다니고 있던 그 언니와 같이 학원을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꼬메디에서 집까지 40-50분 거리를 걷기도 했고, basic fit(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기도 했다.
원래 그 언니와 친했던 일본인 친구와도 같은 레벨의 수업을 들었기에 우리 셋은 거의 매일 만나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도 먹고, 카페에서 공부도 하고, 떠들고 그런 평범하고도 소중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던 와중에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폴리곤(쇼핑센터)에서 나오다가 한국인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우리 셋은 걷다가 웃느라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별 건 아니었지만 정말 웃겼다.
나는 물었다.
"우리 곧 만나게 되는 친구들 이름이 뭐야?"
"호방!" (일본인 친구)
"로빈!"(한국인 언니)
"아 호방이랑 로빈!!"
(잠시 동안의 정적)
" 그 둘은 같은 사람이야."(동시에)
(다 같이 웃기 시작)
프랑스어로 '로빈'은 '호방'으로 발음된다. 그니까 '로빈'은 영어식 발음이었는데 나는 로빈과 호방을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끼리만 재밌는 상황은 엑상프로방스에 놀러 갔을 때 또 연출이 되었다. 거리를 걷다가 점차 커지는 음악 소리에 이끌려 그곳을 쳐다보니,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나팔을 불고 한 명은 북을 치고 있었다.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본인 친구가 나지막이 "Le dos est super"(등이 멋지다)라고 말했다.
곧바로 옆에 있던 한국인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super"(멋지다)를 속삭이듯 외쳤다.
나는 그 둘을 쳐다보았고, 그 둘은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다 또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별생각 없이 음악을 듣고 있던 한 명과 상의 탈의한 두 남성의 등 근육을 보고 있다가
감탄하던 두 명이 갑작스레 무언가를 들켜버린 상황이었다.
두 친구의 풀린 듯한 동공과 나지막한 목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날도 그렇고 이렇게 웃을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정말 마음 맞는 친구 한 명이 필요하구나. 그 한 명이 주는 충족감이 엄청나구나"를 느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관계보다는 두 명일지라도 한 명일지라도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오고 나서는 더 이상의 친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정말 가깝고 소중한 두 명의 친구가 같은 국가 안에 있었고,
집에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안정적인 행복이어서 추가적인 만남(집 밖에서의 만남)은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두 명의 친구와 같이 한국에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좋았다.
원치 않는 만남은 안 하게 되었으며
아무리 세월이 깊다고 한 들 그 시간 동안 나의 영양소가 단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뺏기는 만남이라면 당연하게 만나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신 서로의 영양을 채워주는 소수의 친구들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에너지, 사랑, 지식, 위로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서로 나누며.
이러한 관계가 더 늘어나길 작게 소망하며.
당신이 필요한 영양소는 무엇인가?
당신에게는 정말 친구가 필요한가?
현재 카카오톡 프로필 목록에는 0명만 남겨두었다가,
가족만 추가했다가 소중한 두 명의 친구를 추가했다가,
점점 더 소중해지는 친구를 조금씩 추가하는 중이다.
나의 에너지를 온전히 쏟을 사람들 목록을 천천히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지인들은 나의 카카오톡 목록에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선물하기'는 안 할 것이고 의미 없는 '염탐하기'도 하지 않는다.
지인은 많을수록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한 명이어도 정말 좋다.
지금 나의 옆에 있는 사람은 소중한 인연이다.
p.s.예전에는 만남의 중요도를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은 그 사람들을 100퍼센트 이해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