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가 나한테 돈을 쥐어주었다.
쉬이이잇! 검지 손가락을 치켜든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머리카락은 뒤엉켜 있으며 썩은 이가 드문드문 보이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손마디에 낀 검은 때가 돋보였다.
누가 봐도 그는 노숙자였다.
길목마다 노숙자가 있던 '프랑스 몽펠리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노숙자였다.
프랑스 몽펠리에, 그때의 난 온전히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중이었다.
타지에서 시작하는 첫 자취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살림살이를 하나씩 들여갔다.
접시를 하나 사러 모노프리(프랑스의 유명 마트 브랜드)에 갔을 때였다.
그릇 판매대에 가자 형형색색의 예쁜 디자인의 그릇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음식이라도 편하게 담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을 담아도 잘 어울리는 흰색 접시를 사야만 했다.
3유로로 가격도 저렴하니 말이다.
접시를 들려고 하는 그때 한 노숙자가 다가왔다.
자연스레 약간의 경계 태세에 들어섰다. 그 노숙자는 갑자기 5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서 건네주었다. 당황해서 멈춰 있던 나에게 그는 쉬이이잇! 하며 검지손가락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대고는 손안에 지폐를 넣어주었다.
곧바로 돈을 돌려주려고 하자, 그는 쉿! 하며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돈이 많다며 주머니 속 현금다발을 꺼내 보여주었다.
아주 당황스러웠고 이 상황이 무서웠지만 그 돈을 받을 수 없었던 난 다시 그에게 돈을 건네어보았다.
그러자 얼굴을 코 앞까지 들이밀며 다시 한번 쉿! 하며 'Japanese.. I like Japanese'라고 말했다.
무서워 한국인이라고 말도 못 하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릇 판매대를 지나가던 어떤 남성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다가와 '도와줄까요?'하고 물었다.
그는 이번엔 소리 없이 손과 입으로 쉿! 하며 시야에서 사라졌고,
도와주러 온 남성에게 난 '그가 나에게 50유로를 줬어요.'라고 말했다. 의문이 가득하면서도 어이없는 상황에 웃으며 'well, it's good' 하면서 남성은 인사를 건네고 갔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약간 상기되고 사방팔방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들고 사려고 했던 하얀 접시를 집었다.
접시 하나를 든 채로 자가 계산대로 가자, 다시 그 노숙자가 보였다.
프랑스 마트들은 안전 요원이 3명 정도 있는데 이들이 그를 예의주시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산 품목을 계산할 때, 마치 안전요원들을 놀리듯이 의기양양하게 주머니 속에 뭉툭하게 접혀있는 현금을 꺼냈고 계산했다.
나는 계산대에서도 받은 돈을 돌려주려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또 소리 없이 '쉿'하고, 자신이 산 것들을 가방 속에 담고 있었다.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마트 직원이 '무슨 일이 있냐.'라고 물어보았고 이번에 나는 ' 그가 나에게 50유로를 줬어요.'하고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유유히 사라졌다.
차마 이 돈은 절대 못 쓸 것만 같았다.
접시 하나와 50유로를 들고 마트를 나가면서 그가 왜 50유로를 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먼 타지에 와서 유심히 그릇을 고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으려나?", 아니면 "오늘 한탕 누군가에게 돈을 받은 날이려나."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별 다른 이유 없이 베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그 돈은 그의 바람대로 쓰였다.
자그마한 나의 행복에 그리고 다른 노숙자들에게.
프랑스의 노숙자는 대부분 “돈을 달라고” 꽤나 당당히 요구한다.
언제는 역 앞에서 글씨가 쓰인 스케치북을 ppt삼아 1분 동안 자기소개 발표를 한 뒤,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약간의 경멸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노숙자가 돈을 건네던 모습을 보며 ‘인간다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개인이지만 ‘인간’ ‘사람’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이는 존재들.
결국엔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