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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side up Apr 18. 2024

우리는 꼭 같은 것을 열망해야만 할까?

쓸모를 증명하지 않으면 무시받는 한국 사회


자기 전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쓸모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것이 우선이다. “라는 문장.


고등학교 때를 돌아봐도 그렇다.


공부를 잘하는 소수의 아이들만이 sky반이라 불리고 따로 집중 관리를 받았다.


자습실도 더 쾌적했고, 입시전문 선생님과의 1:1 상담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다 수업들을 때 sky반만 서울대로 견학을 갔었다.


우리 반에는 sky반 학생들이 많았는데 학생의 수 절반이 빠지자(그것도 공부를 잘하는) 선생님들은 “오늘은 애들이 많이 없으니까 자습하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같은 돈 내고 다니는데 이래도 되나? 아니 성적 중하위권 애들은 학생이 아닌가?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또 다른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상위권 학생들 대학 잘 보내려고 여러 행사들을 하고 하는 거지. 다른 애들은 다 들러리야. “


공부를 못하면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외를 받고, 선생님들한테도 차별을 받았던 ‘외고’ 이야기다.


그곳에서 그런 차별은 너무나도 당연했고, 만연했다.


우리의 쓸모를 인정받으려면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외고가 입시를 위한 학원인 줄 모르고 해외로 나갈 수 있는 통로로 봤던 난 그 이상한 논리에 빠지기 싫어서 한동안 방황했다. 상처도 받았다.


돌아보면 참 이래저래 탈이 많았다. (지금 이렇게 건강한 청년인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왔다.


‘해외로 나갈 거야’라는 순수한 마음은 고등학교를 거치니 ‘대학은 가야 해’라는 마인드로 바뀌어 있었다.


대학 생활 동안은 고등학교만큼이나 적나라하게 차별을 받은 경험은 없었던 거 같다.


은연중에 느낀 건 대학의 네임 벨류에 따라 달라지는 ‘시선과 태도’ 정도였다.  


나조차도 그러한 시선을 학습해서 ‘일반화의 오류’를 종종 범하곤 했다. (좋은 대학 다니니, 멋진 사람이겠지. 똑똑하겠지.)


상대적으로 ‘좋은 대학’(네임벨류가 높은 대학 지칭)의 축에 끼지 못하는 대학에 온 난 고등학교 때 친했지만 연락이 뜸해진 애들이 ‘대학 순위’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아마 그중 몇몇은 그게 맞을 거다. 그래서 우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는 악을 쓰고 재수를 하고 삼수를 해서 또는 편입을 통해 좋은 대학에 간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가 국내 대학 학점 교류제도를 통해 한 학기 동안 sky(중 하나)에 다녀보았다.


정말로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시설과 복지가 좋았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래서 좋은 대학 가라고 하는구나. 하고 처음으로 스스로 느낀 순간이었다.


학교 수업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경험을 했으니 굳이 편입을 고려하지 않았다.


사람의 인성과 지혜, 각자의 분야와 관련한 지식도 별 차이는 못 느꼈다. (사람 바이 사람) (지능은 체크를 못했다..ㅎㅎ)


두드러진 차이는 ‘자기 절제력’에 있었다.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


대학에 오니 좀 더 다각적인 방식으로 나를 증명해야 할 것만 같은 순간이 많았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돈과 관련한 어필, 멋진 취미 생활 등등.. 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증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일을 많이 벌려놓다가 번아웃이 한 번 온 적이 있다.


그때 선우정아의 ’ 도망가자 ‘를 들으며 제주도로 훌쩍 떠났다. (그 이후에 제주도 서귀포에 꽂혀 4달에 4번 방문하는 꼴에 이르렀다..)


지금도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나를 증명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우리 사회가 강요한 열망을 나도 열망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나의 온전한 열망이란 있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부에서 작게 들려오는 나의 열망에 귀를 기울여 본다.


“너만의 선택을 할 자신이 있니?”



처음 유럽에 갔을 때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식당 종업원이 풍기는 분위기’였다.


서버들의 나이가 30대에서 많으면 60대까지 있었는데 그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게 눈에 확 띄었다.


손님들과 장난도 치고,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고, 다른 종업원과 웃으며 얘기하고.


왜인지 그 모습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마치 ‘전문직’ 서버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서버라는 직종에 전문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들 같았고, 손님들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 식당 종업원/서버는 생활비가 부족한 20대가 선택하는 알바‘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이미지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중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서는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노숙자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나누고, 포옹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같은 걸 열망하며 경쟁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지구상에 있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며 우리의 ’ 존재‘만으로 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당연시되는 사회적 현상에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 글에 반박을 할 수 있겠다.


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한다.


다른 생각을 가진 게 당연하니까.




새벽녘에 떠오른 문장 하나를 잡아 키보드를 두들기니 의식의 흐름대로 줄줄줄 쓰였다. 내가 느낀 차별의 경험, 열망의 경험, 무시와 존중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포용적이고 관대한 사회였으면 좋겠다. 네모난 얼음들이 마구 생산되는 얼음 틀에 모두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닌 사회. 별 모양, 달 모양도 자신을 부러뜨리면서 그 모양에 맞추기보다 서로의 모양에 감탄하며 칭찬할 수 있는 사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양을 마음껏 뽐내는 그런 사회를 꿈꿔본다.       나부터도 평소에  편견의 생각들을 조심하고, 오만하게 상대를 나의 기준에 맞춰 재단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이 글을 본 당신도 이 세상에 단 하나다.


당신은 소중하고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글 또한 철저히 개인이 작성했음을 다시 알린다. 이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삶이 있다. ‘대학 네임 벨류’를 고민할 때 누군가는 여러 이유로 대학에 다니지 않는다. 학령인구가 줄어가는 현재에도 대한민국 입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역사적 상황과 오랫동안 얽힌 감정 속에서 전쟁 중이다. 우리가 챗 지피티를 예찬할 때 제3세계의 노동자들은 적은 보수를 받고 폭력, 증오, 자살, 혐오의 발언과 관련된 단어를 분류하고 있다. 프랑스에 공부하러 갔을 때 거기서 만난 우크라이나 친구들은 프랑스로 피난을 왔다. 하루는 같이 프랑스어 수업을 듣던 고하(40살, 우크라이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는데 아침에 남동생이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전사했음을 알게 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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