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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붙잡음

에세이

by 인산

우리는 흔히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가령,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글쓰는 행위는 기억을 붙잡는 것이다. 이처럼 종이와 연필에 의해 완성되는 글은 붙잡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종이와 연필,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난 글의 붙잡음은 기억뿐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보존해 준다. 생각은 휘발적이어서 붙잡지 않으면 사라진다. 글은 이러한 생각들을 포착하여 보존해 주므로, 고고학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료이기도 하다. 오래된 무덤을 파헤치는 그들은,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불충이라는 금기를 허가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유물과 글을 통해 과거를 현재와 연결한다. 무덤 속에 남겨진 글은 그들에게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이렇듯 글은 보존과 전달의 의미를 지니며, 시간을 붙잡고 공간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 붙잡음은 곧 고정을 의미한다. 글은 변화 없이 형태적으로 고정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고정된 형태는 생각을 박제하고 기억을 기록하지만, 시간과 함께 흐르거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래의 생각과 감정, 경험의 모든 뉘앙스를 온전히 붙잡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글의 붙잡음이 가진 이런 고정된 특성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히 포착하지는 못한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오히려 글은 고정된 형태이기에 역설적으로 그 빈틈과 여백이 해석의 여지를 풍부히 남겨 놓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읽어내기도 한다. 글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완전한 보자기는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이나 생각을 정리한 글을 다른 사람이 읽을 때,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래된 고문서, 특히 종교의 경전들은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쏟아내는가. 그러므로 글은 분명 무언가를 붙잡고 있지만, 그 붙잡음은 완전무결하기보다 허약한 측면이 있다. 이 붙잡음의 허약함은 곧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이 해석의 다양성은 예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악보 역시 글처럼 붙잡음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종이에 고정된 불변의 것이다. 하지만 이 악보는 연주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 악보라는 붙잡음이 존재하지만,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이 붙잡음은 해체되고 자유롭게 재창조된다. 연극 분야에서 희곡 또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대본은 정해져 있다. 비록 연출가나 배우들이 아무런 변형 없이 대본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그대로 발성하고 연기한다고 해도, 연출가나 배우에 따라 <햄릿>의 무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글이나 악보, 희곡은 무언가를 붙잡고 고정하지만, 이를 구현할 때마다 다르게 살아난다는 것은 신기한 역설이다. 이것이 곧 글의 비밀이자 나아가 인간의 비밀이다.


우리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생각을 전하기 위해 글을 발명하고 이것을 남기기 위해 종이와 연필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글 덕분에 과거의 생각이 온전히 남아 있고 그 생각이 후대에 전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글의 붙잡음이 이처럼 허약한 것이라면,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즉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붙잡음이라면 이를 어떻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글이 생각이나 기억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서 다음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따라서 글의 붙잡음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글로 기억을 남기는 순간, 그 기억의 분명함이 얼마든지 왜곡된 것일 수 있다. 또 하나는 글의 독립성이다. 글로 적는다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지, 기억이나 생각의 하인이 아니다. 글은 무언가를 붙잡고 있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나아가 글은 꼭 붙잡음을 위한 것만도 아니다. 글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생각을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이따금 글이 생각을 앞서가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는 글이 자체로 창조적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글의 붙잡음을 맹신하지 말고, 글이 자체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글의 붙잡음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그 자체로 나름의 충분한 의미와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연주자나 연기자에 따라 동일한 텍스트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을 볼 때, 글의 붙잡음은 허약하기보다는 오히려 글이 지닌 열려있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예술이 지닌 생명력과 위대성도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글은 새삼 인간의 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아가 각자의 시각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글 쓰는 행위에 몰두하는 사람이 종이와 연필을 붙잡는 동시에 놓아버릴 수 있는 도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글의 의미는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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