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마귀 수컷은 자손 증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한다. 교미가 끝난 후 암컷의 먹이가 된다. 남극에 서식하는 수컷 황제펭귄은 혹한을 견디며 혼자서 알을 품고, 소설 <가시고기>로 잘 알려진 가시고기뿐만 아니라 문어도 암컷 대신 수컷이 알을 돌본다. 동물 세계에서 수컷의 희생은 흔한 일이다.
이런 현상이 인간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 아버지라는 이름은 가족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문화에 따른 차이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으로 권위와 힘을 상징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아버지의 위상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이사할 때 식구들이 놓고 떠날까 봐 조수석을 지킨다거나, 장롱에 들어간다는 ‘아버지 시리즈’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주눅 든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종류의 시리즈는 혹시 유교문화의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에 향수를 느끼는 남성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최초로 접하는 것이 어머니이고 젖을 물리는 양육이라는 사실에서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머니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한다. 그러면 현대의 가족에서 아버지는 소외된 존재란 말인가.
영화 <아빠의 화장실>에서의 아버지
우루과이 영화 <아빠의 화장실>(2009)은 아버지의 모습을 경쾌한 블랙코미디로 그려내고 있다. 남미 편 <자전거 도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지독히 가난한 가족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한다. 브라질과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 ‘멜로’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자전거로 국경을 넘나들며 식료품을 밀수한다. 이 밀수는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한번은 교황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마을은 온통 흥분에 휩싸인다. 그 흥분은 종교적 은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마을에 수많은 군중이 몰릴 것이고 그렇다면 노점상을 벌려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전 재산을 털어 각종 음식을 장만하고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한다.
우리의 주인공 비루 역시 일시에 가난을 물리칠 기막힌 계획을 세운다. 유료 화장실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아내를 닦달하여 딸 교육비로 꼬깃꼬깃 숨겨둔 쌈짓돈을 밑천 삼아 기어이 화장실을 만들고야 만다. 화장실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선사하는 장면들이다. 달리기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듯 막바지 순간에 겨우 완성된 화장실이지만 그러나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훨씬 적게 모여든 군중으로 인해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는 신세가 된다. 빚을 갚고 풍족한 삶을 꿈꾸었던 아버지 비루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호객행위를 하게 되고,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던 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영화는 대체로 우울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항상 무엇인가를 궁리하는 비루로 인해 유쾌하다. 교황의 방문이 행복을 가져올 줄 알았으나 그렇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통해 영화는 암암리에 정치적ㆍ사회적 면면을 풍자한다.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으라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대는 아버지의 모습은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현대판 아버지의 전형처럼 느껴진다.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에서의 아버지
또 다른 관점에서 아버지의 의미는 2009년에 개봉된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에서 만날 수 있다. 성장기의 한 남자아이가 주인공인 이 영국 영화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남다른 애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열두 살 숀은 누구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비난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존경과 사랑의 대상인 군인 아버지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갈망이 증폭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채울 길이 없던 숀은 우연한 기회에 동네의 스킨헤드 집단에 끼어들게 된다.
집단의 우두머리인 우디가 어린 숀을 자상하게 돌봐주고 기꺼이 자신들의 멤버로 인정하자 숀은 우디에게서 아버지상을 발견한다. 그러던 중 우디의 친구 콤보가 출옥하면서 분위기는 백팔십도 달라진다. 온순한 우디에 비해 폭력적이고 정치적이며 인종차별이 심한 콤보는 과거 해가 지지 않았던 대영제국의 재건을 추구한다. 콤보는 강력한 철권정치를 구가하여 철의 여인으로 불린 대처의 대처리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아울러 우디와 콤보의 상반된 모습은 아버지의 양면성 혹은 영국의 두 얼굴을 대변한다.
카메라는 폭력적인 콤보에게 더 많은 포커스를 맞추는데 이는 권력과 힘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우디와 콤보라는 아버지의 이중 이미지에 직면한 어린 숀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숀은 콤보의 치명적인 폭력을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숀은 아버지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다시금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정말 아버지는 울면 안 될까?
캐럴을 개사한 ‘울면 안돼’라는 동요에 이런 가사가 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한때, 울면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교육, 특히 남자아이는 절대로 울면 안 된다는 강압적인 교육이 있었다. 이렇게 자기감정 억누르기와 가슴 속 깊이 묻어두기에 익숙해진 남자아이가 성장해서 아버지가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표현 불능증에 빠질 수 있다. 수다는 여자의 몫이라고 믿는 사회문화적 풍토도 그렇거니와 아버지는 항상 보호자나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속에서 자기 감정에 낯선 존재가 됐다. 아버지는 가족의 지주가 돼야 한다는 신념은 오히려 건강한 가족을 형성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아빠의 화장실>과 <디스 이즈 잉글랜드>에서 만난 아버지를 보면서 한국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의 아버지는 어떠한가? 과거의 가부장 시대에 아버지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국의 아버지는 우루과이 영화에서 보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였다. 일에 너무 열심인 나머지 가족을 소홀히 하는 역기능마저 생겨났다. 오늘날 한국의 아버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어때야 한다는 정형화된 틀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멍에다. 울어서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강박관념,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일방의 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스스로를 억누르는 잘못된 신념에 빠질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숨기지 않은 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어깨를 감추지 않고 약한 모습도 보이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실컷 수다를 떨어도 아무런 흉이 되지 않을 사회가 될 수 있다면 분명 그 사회는 훨씬 밝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