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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행복한가

에세이

by 인산

인간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꿈꾸지만 부자는 가난한 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부가 좀 더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작성한 행복 연구는 부유한 국가의 국민일수록 행복도가 높아진다는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가정에서도 일정한 소득 이상인 가정이 그렇지 않은 가정에 비해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서점에는 부자 되는 법을 언급하고 있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자기네 회사에 투자를 하면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광고도 엄청나다. 부와 빈의 개념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과거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은 자칫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축에 끼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 OECD 국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매우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국가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럼 현대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뜻하는가? 대체로 가난한 사람은 물질문명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자동차 소유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자동차를 소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빈부의 차가 결정된다. 세끼를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맛있고 우아하고 값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에 따라 빈부 차가 결정된다. 요즘에는 가난한 집도 대체로 텔레비전이나 세탁기가 있다. 또 냉장고가 있어 여름에도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꽁꽁 언 겨울에도 옛날의 임금님이라도 먹을 수 없었던 여름에 나는 과일을 맛볼 수 있다. 언론 매체는 잠깐 생각만 바꾸면 가난을 한탄할 처지가 못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가난하지 않다’라는 말은 왠지 어불성설처럼 여겨진다. 현대의 부자나 빈자의 개념을 과거의 개념으로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빈곤을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아무리 임금님 밥상보다 근사한 밥상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욱 근사한 밥상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 자식을 학원에 보내야 하는데 학원비가 없어서 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부자가 아닌 것을 가슴 아파한다. 그러니까 무소유를 추구하는 수도승이 아닌 이상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낀다면 가난한 것이 된다. 물질의 빈곤은 행복한 마음에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풍요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자신감도 없어지고 무능력한 인간으로 자책하게 되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부자는 행복한가? 한 마디로 말하면 부자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부자는 행복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는 할 수 있다. 가진 것이 없는 자에 비해 가진 것이 많은 자는 행복의 기회를 더욱 크다. 그러나 부자가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을 충분히 소유한 부자가 항상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물질의 소유는 행복의 조건이며 행복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요소다. 그런데 오로지 부의 추구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면 이제부터 위험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 된다. 부의 추구가 행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나는 무조건 돈을 벌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질문이 연속 이어질 것이다. “그럼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뭐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사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살 거야.” “그다음은?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산 다음에는?”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더 이상 분명하게 대답할 것이 없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지수를 높일 가능성을 갖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는 꿈을 꿔야 한다.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부자가 되어 재산을 권력으로 행사하려 드는 것이다. 부자가 되려는 것이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하는 생각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부자가 되었을 때 좀 더 구체적으로 번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즉 부자 되는 꿈을 꾸되 돈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한국 사람은 돈이 생기면 집을 사는 것이 일 번이다. 이미 집을 소유하고 있다면 좀 더 고급스럽고 넓은 집으로 바꾸려고 한다. 집을 장만하고 나면 두 번째로 자동차를 구입한다. 집에 대한 애착은 높은 인구밀도와 관계가 있다. 한국인은 집을 한 채 소유한다는 것 자체로 그만큼 안정감을 느낀다. 서양에서 주택을 여러 채 소유한 사람은 대부분 유태인이다. 그곳에 사는 한국인들도 여건만 되면 자꾸 집을 사려고 한다. 과거 한반도의 원주민들은 한 채의 집만 있으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집이 없어 사글세를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에게 집의 소유는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조그만 아파트라도 장만하여 드디어 입주하게 되는 날 온 가족은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많은 서양인은 집의 소유에 크게 욕심내지 않는다. 그들이 재산에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집을 소유하면 재산세를 내야 하고 정기적으로 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아한다. 장기임대주택에 살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하수구에 문제가 생기면 주인이 알아서 고쳐준다. 또한 임대인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어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살 수 있다. 서양의 임대업은 한국처럼 개인 대 개인으로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임대사업자와 개인 간에 맺어지기 때문에 주인과 갈등의 여지도 없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돈이 생겨도 구태여 집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있어 부동산은 든든한 재산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농경사회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인에게 땅은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몇 마지기의 논밭 뙈기만 있어도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부동산에 대한 애착은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경제의 부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산은 자식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줄 수 있는 재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돈을 벌면 쌓아놓기보다는 부동산을 장만하는 것이 필수 코스다. 그런데 집을 장만했을 때의 행복감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크고 좋은 집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전에는 내 집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파트가 좁아 보이고 낡은 것 같아 새로 짓는 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흔히들 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꿈을 가지되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꿈을 꾸라고 하면서 용기를 준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부자가 되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과욕은 금물이라고 하면서 부자가 되려는 것은 헛된 욕심이라고 가르친다. “집 있으면 됐지 더 큰 집을 꿈꾸는 것은 욕망이야. 지금부터 물질의 노예가 되는 거라고. 그냥 이 아파트에서 만족해. 처음 입주했을 때를 생각하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말한다. 자 꿈과 욕심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꿈을 꾸는 것은 좋지만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좀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려는 것은 꿈인가 욕심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꿈이기도 하고 욕심이기도 하다. 다른 것들을 희생시켜 아파트를 확장하려 한다면 욕심일 것이며, 경제 능력을 감안하면서 더 큰 아파트를 위해 저축한다면 그것은 꿈이 될 것이다. 결론은 조금 단순하다. 문제는 목표를 세우고 나가는 것은 행복한 것이 될 수 있지만 목표에 매여 다른 것을 희생시킨다면 욕심이 된다는 말이다.


복권에 당첨이 되어 인생 역전이 된 사람들의 뒷이야기가 가끔 전해 온다. 이상하리만치 그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기보다는 비극적이 많다. 부자가 되었는데 비극적인 것은 부자가 되는 꿈만 꿨지 돈을 어떻게 써야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그다음에는... 그다음은 어떻게 할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땀에 젖지 않은 돈은 행복지수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부자들도 심심치 않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부자를 꿈꾸는 빈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저렇게 많은 돈을 놓고 아까워서 어찌 죽나... 이상한 것은 부자일수록 은행 빚이 많다는 사실이다. 대기업 치고 은행 빚이 없는 기업은 없다. 부자일수록 돈이 더욱 필요하다. 부자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누가 내 편인지 알 수 없다. 빈자는 확실하게 안다. 내 편이 아닌 사람은 빈자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누구나 친절하다. 졸부가 되면 옛 친구들이 갑자기 나타나 친한 척하거나, 연락도 하지 않던 사람이 불쑥 연락한다. 다들 친한 척하니 정말 누가 친한 사람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의심의 분위기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돈으로 얻은 친구는 얼마 가지 못한다. 혹시 그가 가난뱅이가 되면 그러한 친구들은 썰물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겨났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가능성은 커진다. 물론 부자 국가가 행복지수가 높고 가난한 국가가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웰빙과 국내총생산 사이에는 명백한 특정 관계가 존재한다. 부유한 나라의 시민은 보다 높은 웰빙 수준을 누리며 산다. 돈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해도 부유한 나라에 산다면 괜찮은 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웰빙 파인더>) 그러나 여기서 웰빙이란 굶지 않는다든가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과 편리를 뜻하는 것이지 행복지수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예상을 깨고 가난한 국가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이 자주 보고되고 있다. 가난한 국가의 행복지수가 높은 까닭은 그들이 골고루 가난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빈부의 격차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나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분노를 느낀다면 행복지수는 낮아질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상대적으로 빈자의 행복지수를 약화시킨다.


부자가 꼭 행복한 것이 아닌 것은 상대성에 있다. 상대적 빈곤을 느끼면 불행하다는 말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이 상대적 풍요를 느끼면 행복해진다는 말과 상통한다. 인간은 열등감의 존재다. 열등의식에 초점을 둔 심리학자는 아들러다. 한국에서 똑똑한 학생들이 모이는 서울대 학생들은 열등의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학과에 따라서 수능점수가 낮은 학과 학생은 높은 학과의 학생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서울대 의대나 법대는 최고의 수능점수를 자랑한다. 그 학생들은 열등감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나름의 경쟁에서 순위가 매겨지므로 낮은 순위의 학생들은 높은 순위의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의대나 법대에서 톱을 하는 학생은 열등의식이 없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 성적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외모나 다른 요소에서 열등의식을 느낀다. 한 마디로 열등의식이 없는 인간은 없으며 아들러가 설파한 열등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를 극복할 때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부자의 개념도 열등의식에서 보면 애매해진다. 최고의 부자가 있을 것이고 그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열등의식을 느낀다면 상대적 빈곤을 느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를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된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면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이 보기에 충분한데도 여전히 목마르다면 상대적 빈곤에 시달릴 것이며 물질 추구에 삶의 목표를 두게 될 것이므로 결국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자들이나 행복 전도사들은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라고 가르친다. ‘상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풍요’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이 역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내가 없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불행해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요약하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행복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여기에 딱 적용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나는 부자일 수 있고 가난뱅이일 수 있다. 가진 것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느낌이 있으면 가난한 것이고 가진 것이 없어도 정말로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부자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가르치는 “욕심이 없는 것이 가장 커다란 욕심”은 이와 상통한다. 십우도에서 찾아 헤매는 나의 마음이 과연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나는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뱅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에는 분명히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데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며 빚더미에 허덕거리는 사람이 나는 부자다 하고 외칠 수는 없다. 없는 데도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쥐뿔도 없으면서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면 노력하지 않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할 여지가 많다. 그러므로 생각하기 나름은, 분명히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데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등한시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행복 전도사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고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상대적 풍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 거지 아빠가 거지 아들과 불난 집 모퉁이에서 불을 쬐면서 “넌 아빠를 잘 둬서 집에 불날 걱정이 없다”라고 말했다는 우스갯소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예화다. 그러나 사실 거지 아들은 거지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은 없는 자의 슬픈 메아리처럼 들릴 것이다. 정말로 거지 아빠가 집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며 그는 바보 거나 현자, 또는 가난한 현실을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게으름뱅이일 것이다. 문제는 거지와는 달리, 외적인 조건이 충분히 풍부함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메달리스트의 메달 색깔에 따라 만족도가 다르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은메달을 딴 선수와 동메달을 딴 선수 중 누가 더 행복감을 느끼냐는 것인데 동메달리스트가 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은메달은 금메달을 놓고 경합한 결과 패배한 결과이며 동메달리스트는 승리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메달리스트는 하마터면 메달을 따지도 못했을 수도 있었기에 행복감은 금메달리스트 못지않다. 말하자면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동메달리스트는 상대적으로 패배의 쓰라림을 간직하고 있는 은메달리스트에 비해 더욱 행복한 것이다. 단 동메달리스트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당당히 3위에 입상한 선수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행한 은메달리스트처럼, 부자라고 하더라도 감사할 줄 모르면 불행해진다.


대체로, 어려서 고생을 해서 자수성가한 부자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이 크다. 어렸을 때 있었던 고난은 오늘날의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잣집에 태어나 부자로 자란 사람은 주어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궁핍을 느껴보지도 못한 그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 대에서 이룬 기업이 다음 세대에서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버지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기업을 일으켜 세울 줄만 알았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결과인 것이다. 자식의 물질적 욕구를 무조건 충족시켜 준다면 강인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없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처럼 약간의 찬바람만 맞아도 쓰러지고 만다.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잡초처럼 더욱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교훈은 만고의 진리다. 어려움을 경험한 적이 없는 자식이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을 때,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가 바람막이가 되지 못할 때 약간의 난관이나 장애물을 만나도 자식은 손쉽게 포기하고 만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도전정신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무책임하게 회피하려고 한다. 물질의 부족함을 모르는 아이는 성장을 해서 물질에 약간 문제만 생겨도 상대적으로 빈곤에 처할 위험이 상당히 크다.



분명한 것은 돈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돈과 행복에 관련된 유명한 연구자는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 교수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의 경제성장과 행복지수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를 ‘이스털린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고 한다. 이스털린은 자신의 연구에서 바누아투, 방글라데시와 같은 빈국의 행복지수는 높고,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선진국은 오히려 행복지수가 낮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그의 연구가 꼭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경제 수준이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 집을 장만하여 행복이 충만했지만 얼마 못 가서 시들해지는 사람처럼, 돈으로 이룬 행복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어 단기 행복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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