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이 작품은 중국 원나라 극작가 기군상(紀君祥, 1271-1368)이 쓴 잡극(雜劇) 형식의 희곡으로, 원제는 『조씨고아대보구』(趙氏孤兒大報仇)이다. 잡극은 언어와 음악의 요소가 결합된 연극으로 비극과 희극의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며 민중적이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가 특징이다. <조씨고아> 줄거리의 배경은 춘추시대 진나라로 설정되어 있다. 가족의 멸망, 아이의 생존, 대가(代價)와 복수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이 희곡은 중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유럽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서양인이 본 최초의 중국 희곡 중 하나로 평가된다. 단풍이 붉게 물든 11월 23일 한가한 일요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찾았다.
줄거리와 현대적 해석
국립극단에서 2015년 및 2017년에 이 작품을 공연했고 이후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고선웅이 각색 및 연출을 맡았으며, 원작의 도덕성과 구조를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한 시도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원작의 이야기를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하다.
<조씨고아>의 주요 인물로 도안고가 있다. 그는 진나라의 권세 있는 장군이자 야심가로, 정적인 조순과 그의 가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 결과 조순의 일가 300명이 희생된다. 멸문지화를 당한 조순에게는 아들 조삭과 그의 아내 공주가 임신한 태아가 있을 뿐이다. 공주는 아들을 낳지만, 조삭은 복수를 부탁하고 자결하고 공주 또한 의원인 정영에게 아들을 맡기고 목을 맨다. 어쩌다가 아이를 맡게 된 정영은 조씨 가문의 비극을 복수하도록 자신과 가족을 희생시키고 조삭의 아들 조씨고아를 몰래 키워 원수를 갚도록 한다. 각색에서는 친아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정영의 인간적인 고뇌가 더욱 깊이 있게 그려진다. 은퇴한 신하로서 조순의 충의를 잘 아는 공손저구 또한 도안고에 맞서 정영이 조씨고아를 숨길 수 있도록 돕고 자기희생을 감수한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조씨고아는 성장 후 복수를 완성한다.
이렇듯 이 희곡은 줄거리 자체가 극적이다. 부모를 죽인 자에게 복수한다는 설정 또한 드라마틱하다. 더구나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여러 명이 희생되는 과정은 관객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특히 정영 부부는 자신에게 떠넘겨진 그 피붙이를 살리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한다. 그러니까 이 연극의 핵심 이야기는 내맡겨진 아이의 생명과 그의 복수를 위해 자기 아들과 아내를 희생시키고 이십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정영의 슬프고 뼈저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들과 아내를 잃은 후 정영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조씨고아를 내동댕이치려고 높이 쳐들면서 끝나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눈물샘을 심하게 자극한다.
이 지점에서 다음을 질문해야 한다. 정영이 가족을 희생시키며 지키려 한 조씨고아는 그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과연 우리는, 혹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은혜를 입은 사람의 자식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이 연극을 깊이 있게 다가서려면 우선 이 점을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설이 쓰인 당시의 중국의 상황과 그들의 정신문화를 알아야 한다. 현대 관객에게 <조씨고아>에서 제시하는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 은혜를 갚는 일, 의리를 지키는 일, 한번 맺은 관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하는 등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정영도 정영이지만, 냉궁을 지키는 하장군 역시 그러하다. 과거에 조씨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그는 조씨의 유일한 핏줄을 처단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장영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자결함으로써 은혜를 갚는다. 공손저구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이 연극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 이념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은 현대 관객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론 이야기 자체가 극적이어서 감정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도록 할 수는 있지만 전반적인 주제를 따져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이때 부각되는 인물이 곧 정영의 아내다. 연극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조씨의 핏줄에 대해 어떠한 의무나 책임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에게 대의, 의리, 충, 보은 같은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이념일 뿐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미로서 자기 자식을 살리고 싶어 한다. 이 점은 분명 오늘날의 관객에게 크게 어필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다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아이를 죽여야 하는 상황, 이를 실행하려는 남편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으로 이 불가항력의 상황에 항거한다. 대부분 인물과는 달리 정영의 아내가 보인 행위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행위라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관객이 가장 깊이 정서를 이입한 것도 아들을 내놓지 않으려는 아내와 자기 아이를 빼앗아 사지에 몰아넣으려는 남편 간의 다툼의 장면이었다. 무대에서 이 점을 강조한 것은 현대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선웅 연출 미학
2025년의 <조씨고아>는 고선웅 연출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단 그는 비어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공간의 비어있음은 절제된 무대를 유지하여 자유로운 공간 운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전 공연에 비해 더욱 확장된 무대 규모지만, 완전히 비어있는 공간에 배경 전체에 붉은 커튼이 쳐져 있고 드라마에 필요한 소품은 줄을 매달아 천정에서 내려오도록 하여 인물들의 움직임이 자유롭게 하였다. 숨 가쁘게 뛰는 장면이 많았지만,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장치 덕분이다. 무대 바닥 안쪽 한가운데 부분을 내리막을 만들거나 오르막을 만드는 볼륨 조절로 상황에 따른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장치 덕택에 무대의 좌우, 앞뒤는 물론 상하를 폭넓게 사용한다. 커튼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처럼 비어있는 무대는 공간의 운용에 자유를 주어 스케일이 큰 무대라 하더라도 무리 없이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하나는 언어다. 예컨대 “아!”라는 감탄사는 그저 탄식에 그치지 않고 과장하여 크게 길게 끌면서 감정을 끌어올린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한다네” “그렇다네” 등 “네”로 끝나는 어법이다. 여기에 “...네” 부분에 더욱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이러한 어법은 단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서, 진술이지만 강요하지 않는 은근한 설득력이 있다. 또 유체 이탈처럼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효과도 있다. 아울러 운율을 완성함으로써 반복되는 언어의 느낌을 강화한다.
또한, 연극적 상징이 풍부하다. 예컨대 검은 부채를 들고 검은 옷을 입은 묵자(僧家)는 죽음의 사자로 등장한다. 그가 죽은 자의 얼굴 앞에 부채를 펼치는 순간, 관객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결이 거두어지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체험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소품 또한 의미심장하다. 가령, 장성한 아들이 그림으로 재현한 진실을 믿지 못하자 정영이 자기 팔을 자른다. 그 순간, 이미 허공에 매달려 있던 팔은 그 절단이 오래전부터 예정된 희생이었음을 암시한다. 들판과 궁궐 등으로 끊임없이 전환되는 무대 공간 역시 상징적 장치의 연장선이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비는 호접몽(胡蝶夢)의 이미지로서, 인생이 한낮의 꿈과 같으며 삶과 꿈의 경계가 애초에 모호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상징이다.
그의 연출은 극장주의에 가깝다. 가령 흐르는 피를 붉은 천으로 표현하면서 무대가 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 이에 관객은 극 속에 빠져들기보다 연극적 장치와 메시지를 인식하게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영이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고 아내와 다투는 가슴 저미는 장면에서, 관객이 극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다. 연극임을 드러내는 거리두기의 연출에서도 관객이 얼마든지 감정 몰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감정은 환상이 아닌 인간적인 공감에서 생겨난다. 피를 붉은 천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고통이라는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징은 현실보다 더 강한 감정적 진실을 건드릴 수 있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잃는 서사는 보편적 감정에 직접 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관객에게 두 층위를 동시에 경험하도록 한다. 하나는 “이건 연극이다”라는 메타 인식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지만 저 감정은 진짜다”라는 공감 인식이다. 관객은 연극성의 드러남 속에서 오히려 감정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인식하고 몰입하게 된다.
한편, 고선웅의 연극에는 유머가 있다.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무겁고 슬프다. 진실이 왜곡되고 간신이 충신을 이기며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럼에도 양념처럼, 진지한 장면마저도 웃음기가 묻어있다. 경우에 따라 유머는 감정을 대비시켜 비극성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장치다. 관객의 마음이 열려 있는 순간에 쓱 치명타가 들어오는 것으로, 웃음 직후에 찾아오는 비극은 마음을 훨씬 더 아프게 한다. 또 유머는 관객의 감정에 숨 쉴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연속된 비극은 감각을 무디게 하지만, 유머는 순간적으로 긴장을 풀게 한다. 즉 감정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몰입의 탄력성을 유지하게 하고, 장기적으로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극장주의와 관련하여 유머는 비판적 관극을 위한 인식의 틈을 제공한다. 관객을 지나친 감정 몰입에서 잠시 떼어내어 극적 메시지를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씨고아>에서 유머는 비극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극의 진실을 더욱 깊고 생생하게 드러내도록 한다.
복수 이후에 무엇이 남는가?
선한 자가 악한 자를 물리치고 복수를 완성하는 모습은 후련함을 준다. 공연 내내 도안고의 악행에 치를 떨던 관객은 그가 응당한 대가를 치를 때 손뼉이라도 치고 싶다. 소위 권선징악의 주제는 이러한 드라마틱한 장점이 있다. 그런데 <조씨고아>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마지막 장면에 흰나비를 날리며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을 말한다는 것이다. 정영이 긴긴 20년을 꾹꾹 참으며 갈고닦아 결국 복수를 완성하지만, 복수가 완성되었을 때 이제 그에게 더 이상 살아갈 동기부여가 없다는 점에서 허무한 측면이 있다. 그 통한의 시절이 일장춘몽과 다를 바 없다는 허무감이 밀물처럼 밀려온 것이다.
이 점은 연출의 현대적 미학이기도 하거니와 영화 <올드보이>에서 말하는 복수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이우진은 복수를 완성했지만, 복수가 해방도 치유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살해 버린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오대수 또한 복수를 향해 달려왔지만, 복수 이후에도 여전히 상처, 정체성의 혼란, 죄책감이 남는다. 영화는 “복수를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 “복수는 진정 해결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인가?”를 질문한다. 이렇듯 마지막 무대의 빈 공간에 한 마리의 나비를 날림으로써, 복수의 끝이 곧 성공이나 만족이 아닌 공허감 혹은 자기와 다시 진지하게 마주하는 순간이라는 점을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