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튤립>, 평화로운 가해의 풍경

공연 리뷰

by 인산

2026년 3월 8일, 서울 대학로에는 꽃샘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그날 오후 4시 공연으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내린 극단 돌파구의 연극 <튤립>(김도영 작, 전인철 연출)은 아름다운 꽃 이름 뒤에 숨겨진 깊고 비극적인 울림을 전했다. 작품은 역사의 비극이 남긴 붉은 흔적을 드러냈고, 관객에게 무거운 여운을 남겼다. 출연진은 다음과 같다. 쿠로 역에 권정훈, 쥬리프 역에 김하람, 야마토 역에 김정호, 에리코 역에 황순미, 미호 역에 윤경이 열연하여 무대를 강한 열기로 가득 채웠다.


뺏긴 자의 침묵과 보상 없는 죽음


극은 1920년대 도쿄의 한 가정집에서 시작된다. 일본 군국주의가 광기를 드러내던 일제강점기의 시대가 배경이다. 이 집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 야마토와 아내 에리코, 그리고 아들 쥬리프(튤립)가 살고 있다. 여기에 조선인 가정부 미호와 학교 정원을 돌보는 조선인 쿠로가 더해지며, 서로 얽힌 관계 속에서 비극의 실타래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 가정의 평화로운 일상은 연해주 연추 지역의 붉은 튤립 들판에서 시작된 참혹한 사건 위에 세워져 있다. 전쟁 중에 군인 야마토는 끝없이 펼쳐진 튤립 들판에서 혼자 아기를 낳던 조선 여인을 발견한다. 그는 갓 태어난 아기를 빼앗고, 아기를 지키려던 산모를 칼로 살해한다. 그리고 아기를 안은 채 그곳을 떠난다. 그 아기가 바로 쥬리프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아기의 아버지는 흐트러진 튤립 사이에 쓰러져 있는 아내와 피로 물든 들판을 마주한다. 아기는 이미 사라진 뒤다. 일본 군인이 아기를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 끝내 도쿄까지 흘러 들어온다. 그가 바로 쿠로다. 도쿄에서 쿠로는 쥬리프가 다니는 학교 정원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소년 쥬리프와 우정을 나눈다. 나이 차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핏줄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끌림처럼 보인다. 쿠로는 쥬리프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끝내 밝히지 않는다. 조선에서 노비 출신으로 변변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그에게, 아들이 넉넉한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쥬리프는 학교를 졸업해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게 되자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진 쿠로 역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에리코는 자신과 가족의 평온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쿠로를 살해한다. 마지막까지 예의를 지키며 먼발치에서 자식을 바라보려 했던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 연극은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도 전쟁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시점에서 조선인 암살자가 일본 장군을 살해했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조선인에 대한 반감이 거세다. 또한 가해자인 야마토는 제대 후 기업에 재취업하여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피해자인 쿠로는 복수심조차 품지 않은 채 그저 자식을 바라볼 뿐이다. 다만 진실을 마주한 에리코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선택한다. 그녀는 떠나려는 그에게 차를 제공하지만, 그 안에는 독이 녹아 있다. 조선 하층민 출신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고된 노역을 하는 바람에 얼굴에 검은 그을음이 새겨진 쿠로는 이렇게 삶을 마감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그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일제가 강요했던 내선일체의 허구성과 나라 잃은 조선인 전체의 처절한 실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연출 미학 : 블랙박스에 담긴 원초적 에너지


전인철 연출의 무대는 지극히 전위적이다. 등퇴장을 위한 출입구 하나 없이 전체가 폐쇄된 대극장 무대는 검게 칠해져 있어 마치 거대한 블랙박스 같다. 본래 프로시니엄 구조인 이 공간을 블랙박스로 활용한 것은 공간의 폐쇄성과 무한한 확장성을 동시에 획득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화병, 주전자 그리고 의자 몇 개가 무대 주위에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아울러 무대 전체의 검은색 설정은 분석심리학적으로 개인의 그림자(Shadow)가 투사된 무의식의 공간과 흡사하다. 그러니까 이곳은 인물들이 가진 역사의 상처와 억압된 본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심리적 컨테이너인 셈이다. 빈 무대에서 한 송이의 튤립이 무한한 정원으로 확장되는 상상적 현상에서, 관객은 단 하나의 상징적 단서를 통해 자신의 전 생애적 서사로 확장해 나가는 역동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튤립>에서 보여준 연극의 전위성은 파격을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는 실존적 해체였음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고 할 수 있다.


배우들의 등퇴장 방식 또한 예사롭지 않다. 막이 열리면 다섯 명의 배우는 무대가 아닌 객석 측면에서 입장해 일렬로 선다. 이들은 끝까지 퇴장하지 않고 자기 역할이 끝나면 무대 구석에서 대기한다. 관객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자기 차례가 되면 무대 중앙으로 나와 살아있는 인물이 된다. 이러한 노출은 관객이 극에 몰입하기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하나의 연극임을 인지하도록 하는 소외 효과를 유발한다. 이는 서사극이라는 이론을 넘어, 개인의 비극을 통해 역사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특히 처음에 입장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 나가는 마지막 퇴장 방식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궤도와 순환하는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조명은 천장 조명을 과감히 포기하고 객석 쪽 정면광만을 사용한다. 이는 배우의 이목구비라는 구체성을 지우고 신체의 선과 실루엣을 부각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방식의 조명은 배우의 몸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공간을 채우도록 하면서 동시에 관객과 조명이 대치하는 구도를 통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한다. 아울러 이러한 조명 효과는 배우의 실루엣을 강조하여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지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또렷한 얼굴 윤곽이 자리에 남은 배우의 몸과 움직임은 언어적 방어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자기(Self)의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주인공의 벗은 몸은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적 역사성과 사회적 신분을 모두 벗어던진 채 비극적 진실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의 벌거벗은 실존을 상징한다. 맨살과 흐트러진 꽃잎, 흙더미 같은 원초적 물질은 사회적 허울을 벗겨낸 인간 본연의 생명성을 강조하며, 연출 미학의 정점을 이룬다.


한편, 무대 안쪽 벽에 기대어 있는 그림 한 점이 눈에 띈다. 이 그림은 극이 진행되면서 상수로 이동하는데 그 시점을 정확히 할 수 없지만, 그 이동의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여하튼 화풍을 보면 그림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임이 거의 분명하다. 베이컨은 인간의 신체와 얼굴을 기괴하게 뒤틀거나 일그러뜨린 형상으로 표현하면서, 존재의 고통과 실존적 불안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어둠을 배경으로 고립된 인물을 배치하고, 신체를 겹치거나 뭉개듯 표현하는 방식은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미학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감각은 연극 <튤립>의 무대와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예컨대, 무대 전체가 검은색이라는 점, 조명 효과에 의해 배우의 몸을 강조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림 속 인물이나 무대의 인물들은 표정이나 개별성을 강조하기보다 신체의 윤곽과 움직임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도 유사하다. 이러한 효과는 인물들이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개별 인물보다는 원초적 존재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들뢰즈(Deleuze)가 저서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며 제시한 미학과도 맞닿아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의 그림은 인물을 재현하는 구상적 회화가 아니라, 감각의 강도를 드러내는 “신체의 사건”에 가깝다. <튤립>의 배우들 역시 얼굴의 서사적 표현을 벗어던지고 신체의 에너지와 움직임으로 무대를 채운다. 이는 구상의 재현을 넘어 감각의 힘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배우들의 화술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의 언어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리듬에서 벗어나 거세고 힘찬 울림을 강조함으로써 언어 자체의 감각성을 부각시킨다. 이처럼 <튤립>은 내용상 논리 정연한 서사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안에서 투박하고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생명이 존재한다.


정적 속에 흐르는 거센 강물


극 중 주무대인 가정집은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 평화는 타자의 고통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성과 같다. 특히 쿠로의 언어와 몸짓에는 전쟁이 남긴 고통의 흔적이 강하게 배어 있어, 표면의 잔잔함이 오히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을 증폭시킨다. 또한 쿠로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는 설정은 관객에게 깊은 무력감을 남긴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감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한다. 작품은 인위적인 권선징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보다, 비극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관객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도록 한다. 이러한 효과는 감정적 동일시보다 비판적 인식을 유도하는 서사극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이렇듯 연극 <튤립>은 시각적 화려함을 절제하고 배우의 몸과 무대 공간의 본질에 집중함으로써, 전쟁의 비극과 그 속에서 스러져 간 개인의 희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극단 돌파구는 “<튤립>은 거대한 사건을 고발하기보다, 전쟁이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응시한다. 튤립은 꽃이 아니라 구근을 키우는 식물이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또 다른 생을 준비한다. 이 작품에서 튤립은 장소이자 기억이며,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근원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제목을 구근식물 <튤립>이라 붙인 것은 혈통이라는 두 남자의 질긴 욕망을 상징하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구근식물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음 생을 준비하며 살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튤립’은 쿠로의 죽음 이후에도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쥬리프를 통해 또 다른 서사가 이어질 가능성을 암시하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역사적인 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혹은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꽃샘추위보다 더 시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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