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상담의 시대는 바람직한가

에세이

by 인산

현재 상담이 뜨고 있다. 대학에 개설된 상담심리학과에도 학생들이 몰려든다. TV에서도 상담 관련 프로그램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 ‘우리 아빠가 달라졌어요’ ‘우리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등 모두가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방영된다. 달라진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면 달라지기 전에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으며, 왜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등등 많은 것들이 궁금하다. 이러한 궁금증에 덧붙여 다음의 질문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처럼 뜨고 있는 상담이 최근의 현상이라면 이전에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것일까?


안타깝지만 요즘에도 상담하고 싶어도 어디에서 상담해야 좋을지, 믿을 만한 전문상담소는 어디에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가끔 상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만 전문적으로 상담을 받을 만한 곳도 잘 알지 못하고, 설령 상담소를 알았더라도 실제로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감추고 싶은 개인적인 문제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털어놓는다는 것도 부담스럽고 또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한국문화에서 상담소 방문은 그 자체로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 전문상담소가 생긴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현재에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소도시에서 상담소라는 간판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배가 아프면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 먹을 수 있지만 마음이 아플 때 들를 곳이 없다는 얘기다. 과거에 상담소가 없었다고 해서 한국인에게 상담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상담을 전문적으로 받는 것이 여의찮았을 때 한국인은 과연 마음에 쌓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혹시 이전에는 특별히 상담소가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씨족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한국인은 친척과의 교류도 활발했고 친구도 많았다. 형제도 많았을 뿐 아니라 팔촌과 사돈까지 합치면 엄청난 사람과 혈연을 맺었고 친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 따라서 어떤 아이가 부모와 말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또래의 친척이나 친구와 상담할 수 있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이모나 고모, 삼촌들도 상담사 역할을 하였다. 비록 그들은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자체만으로 고민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다.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문제를 토로하는 사람이 입으로 소리 내어 표현하다 보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몇 세대의 대가족이 함께 살았던 과거의 한국 사회는 들어줄 사람이 많았던 사회구조였다.


그러나 대개 맞벌이 부부 밑에 한두 명의 자녀로 이루어진 현대의 핵가족에서 혹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집이 잠만 자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말할 시간도 없거니와 들어줄 가족이나 친구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어딘가를 찾아가서 처음 보는 사람(상담자)에게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기도 쉽지 않다.


씨족사회의 특징은 소문이 굉장히 빠르다는 것이다. 전통 가옥인 한옥의 담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대문을 잠그지 않은 채 외출할 수 있었던 것은,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친척이거나 적어도 이웃사촌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누군가 동네로 들어오면 개들도 시끄럽게 짖어댈 뿐 아니라 동네 어귀에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벌건 대낮에 도둑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또 만일 누구네 집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는 동네 문제가 되었다.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것이 씨족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씨족사회에서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등과 같은 소문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말조심을 단단히 해야 했다.


이런 문화에서 누군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아무도 몰래 살짝 정신병원에 들렀다고 하더라도 어느 틈엔가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상담소도 마찬가지다. 누가 상담소에 들렀다고 소문나면 그는 문제가 심각한 사람으로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한국 사람이 근본적으로 정신과나 상담소에 가기를 꺼리는 것은 빠른 소문이나 참견을 좋아하는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의 주 거주 형태는 아파트여서 크게 소문이 날 것은 없지만 남 일에 참견하고 상관하는 습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파트 문화는 많은 것들을 단절시켰다. 아파트는 소문을 차단했지만, 말하고 싶을 때 들어줄 사람도 없애 버렸다. 친척들 간의 왕래도 뜸하고 학교나 학원 친구도 경쟁 관계가 되어 버린 지금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상의할 사람이 없어졌다.


말할 곳이 없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자살률의 증가, 우울증 환자의 증가, 장애아의 증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말할 수 있는 곳, 즉 전문상담소다. 자연스러운 상담이 막힌 상황에서 인위적인 상담으로나마 소통의 물꼬를 트려는 것이다. 학교에 상담교사를 배치하거나 교육지원청에 Wee센터를 설치하여 학생들의 상담을 지원하는 것은 갑자기 국가의 위상이 높아졌다거나 사람들의 사고가 선진국화되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과거 혈연이나 교유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던 자연스러운 상담의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현대의 청소년들은 텔레비전 속 상담 프로그램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의뢰자가 다양한 분야 전문상담가의 입체적인 상담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보면서 내심 후련함을 느끼고, 상담에 대해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따진다면 상담이 뜨는 사회가 썩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심리학과 상담학은 처음에 독일이나 미국에서 활성화되었다. 이 나라들이 전쟁을 많이 치르다 보니 상담받을 사람이 많이 생겨났고 그래서 그 분야의 학문이 발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독일은 세계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켰고 미국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적이 없지 않은가. 또 상담이 귀향 군인들을 상대로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 이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상담 전문가가 농촌 노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는 농촌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집단상담하였다. 요즘 시골은 참으로 심각하다. 젊은 부부는 가물에 콩 나듯 만날 수 있어 시골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 할아버지보다 할머니의 평균수명이 길기 때문에 할머니들 가운데 열 중 일곱은 나 홀로 할머니다. 재밌는 것은 나이가 들면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에게 치인다는 사실이다. 노인들 집단상담을 하다 보면 참여자 대부분은 할머니고 할아버지는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몇십 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온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집단상담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하기도 하였지만 동네 할머니들은 최소 사돈 팔촌 간이어서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서로가 다 아는 처지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는 동네에서 어떻게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말하겠는가. 더구나 할머니들은 괜한 말을 했다가 자식에게 해가 될까 봐 식구 이야기는 가능한 한 피하려고 한다. 할머니들은 “모두 다 좋아요. 서로 아주 친해요”라고 하면서 자신이 겪은 고생스러운 이야기는 한사코 거부하였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입을 꼭 다물었다. 회상기법으로 흔히 써먹는 사진을 가져오라고 해도 “사진 없어” 하면서 버텼다.


이런 판국에 사명감에 불탔던 상담사는 노인의 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담은 영화 <죽어도 좋아>를 함께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상황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느라 영화를 끝까지 본 할머니도 없거니와 영화가 끝났을 때 상담사는 왜 그런 걸 틀었냐고 한참이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당연히 토론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할머니들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상담이 아니었다. 다만 매일 만나 하릴없이 고스톱만 쳐대는 할머니들에게 뭔가 새롭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속속들이 서로를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과거 한국인에게 친척이나 친구 이외에 상담 역할을 한 것은 종교였다. 한국의 전통 종교는 말할 수 없이 억제된 삶을 산 며느리나 피지배층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한 까닭에 한국인에게 전통 종교는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종교를 통해 나를 찾고 타인을 용서하고 나아가 화해의 기회를 찾고자 하였다. 전통 종교 위에 덧씌운 현대종교 역시 전통 종교의 색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 한국처럼 다양한 종교가 한데 어울려 조화롭게 살고 있는 국가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이다. 어느 한 종교가 득세하면 다른 종교는 발붙일 수도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인은 종교에 대해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다. 가톨릭, 기독교, 불교 등이 함께 존재하지만, 성당 옆에 교회가 있고 좀 떨어진 곳에 사찰이 있는가 하면 교회 근처에 점집이 있지만, 외국처럼 종교 문제로 집단 패싸움이나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인은 종교가 달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도 부담 없이 사찰을 찾고, 성당에 다니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거나 반대 현상도 종종 목격된다. 가톨릭과 기독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경험한 유럽인 같으면 구교에서 신교로 혹은 신교에서 구교로의 개종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개종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은 별생각 없이 이곳(성당)과 저곳(교회) 그리고 또 저곳(사찰)을 기웃거린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일이다. 오래전부터 종교에 대한 너그러운 전통이 반영된 까닭이다. 민간신앙으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점집은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수를 자랑하고 있다. 원시종교 형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점집은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상담소다. 저마다 고통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점집을 찾아 위로받고 용기를 얻을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원시종교는 순기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한국인은 종교적인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민간신앙이든 국가에서 정한 국교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국인은 종교적 믿음을 깊게 간직하고 있었기에 특별히 전문적인 상담소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사발에 정화수를 떠놓고 외지의 자식을 위해 정성껏 빌었던 어머니는 그 성스러운 몸짓 덕택에 스스로 정화되어 자식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불행히도 과거에 비해 현대 한국인들은 정화의 기회가 많지 않다. 커다란 소음의 노래방은 잠깐은 위로를 줄 수는 있겠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아파트 공간에서 엉켜 살게 되면서 소통하던 배관은 막혀 버렸고 종교적 출구도 경색되었으며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개인은 갈수록 폐쇄된 구석으로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 사회는 상담이 절실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keyword
이전 04화한석봉 어머니가 전하는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