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일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전문상담사로부터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는 몸이 아프면 평소 자주 드나드는 단골 의사를 찾아간다. 단골 의사는 다른 말로 주치의다. 주치의는 나에 대한 모든 의학적 기록뿐 아니라 나의 유전과 환경과 관련된 정보를 잘 알고 있으므로,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좀 더 빠르고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단골 카센터로 가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유리하다. 이처럼 서로 간에 잘 알고 있는 단골 전문가는 문제가 생겼을 때 좀 더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문상담사가 한 아이의 지능, 적성, 취미, 성적, 가정환경, 교우관계, 음식 습관, 건강 상태, 심리나 정서 등을 계속 점검하여 하나의 프로파일을 만든다면, 이들을 종합하여 진로지도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아이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십이 년간의 전문상담사와의 상담 결과를 토대로 대학을 위한 진학지도를 한다면 최상의 진로지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현재 학생 진로상담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확실히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대학 진학지도는 대부분 담임이나 진학 담당 교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업무에 시달리는 교사와 학생이 일대일 면담에서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놓고 장시간 토론할 여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누가 보아도 참고할 수 있는 것은 학생의 현재 성적이다. 그 학생의 성적으로 가능한 대학이나 전공과를 선택할 것이다. 말인즉 학생의 성향과 특성이 아닌 성적으로 대학 진학을 지도하는 것이다. 십이 년간 축적된 자료를 참고 삼아 지도하는 것과 성적을 바탕으로 진학지도를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직 가치관이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고 여전히 진로에 대해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한 학생은 장차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교사가 성적으로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전공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전공을 택했을 때 과연 대학에 진학하여 잘 적응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설령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입학해서 한 학기 수업을 듣고 자신이 원하는 학과가 아니라는 생각에 휴학이나 자퇴를 결정하는 학생이 상당하다. 부모의 눈치를 보다가 그럭저럭 4년을 이끌고 졸업했다 해도 다시 새로운 전공을 시작하는 학생들도 꽤 된다. 이런 현상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시간과 돈과 에너지의 낭비이므로 사회 전체에 커다란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스포츠에서 훌륭한 선수가 되어 국위를 선양하는 선수들이 있다. 만일 어렸을 때 그 자질을 알아보지 못하고 운동을 못하게 막았다면 오늘날의 훌륭한 선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각 분야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수준 높은 수학이나 물리학을 알지 못해도 별 지장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 한번 손을 잡으면 몇 시간이고 집중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와 관련된 학문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학에서는 천재 소리를 듣지만 음치일 수 있고, 글은 아주 잘 쓰지만 셈 계산은 못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 덧붙여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사회적 합의다. 현재 한국 사회는 학력 사회다. 겉으론 학력 철폐를 외치지만 상황만 허락한다면 누구나 좀 더 높은 학력을 갖고 싶어 한다. 단순히 한국인이 학구열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은 미심쩍다. 사회에서 높은 학력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만일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하였을 때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학 졸업자와 차등이 없다고 한다면 고교를 졸업하고 곧장 취업할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프랑스의 대학생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프랑스 대학교는 졸업정원제이기 때문에 대학 입시 자격시험(바칼로레아)만 통과하면 누구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뜨거운 여름의 바캉스가 끝나고 선선한 바람과 신학기가 시작되면 대학 캠퍼스에는 신입생들이 엄청나게 몰려든다. 대형 계단강의실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겨울이 되고 크리스마스 방학이 지나고 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 학생 수가 급감한다. 프랑스 대학은 학사 일정이 빡빡하고 성적도 엄격하여 상급반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요인을 살펴보면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학 졸업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만일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 대학 졸업장이 꼭 필요하다면 그들은 한국 학생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학점을 잘 관리하여 꼭 졸업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없더라도 사회에 진출하여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기 때문에 대학의 전공이 자기의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다른 길을 모색한다. 부모도 구태여 공부하기 싫다는 자식에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공부가 다는 아니라는 생각, 일찌감치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경험을 쌓는 것이 그의 앞길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풍토가 학력을 크게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의 대학 졸업자 수는 입학자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고 대학 졸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프랑스 학생은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바꾼다. 이러다 보니 상급 학년의 강의실에 가 보면 프랑스 국적 학생보다 외국 국적 학생의 숫자가 많고 대학원 수업에는 외국 유학생 비율이 더욱 높다. 프랑스 학생 중에는 처음부터 대학(Université)보다는 실기를 중시하는 에꼴(École)을 선호하는 학생이 꽤나 된다.
여하튼 프랑스 대학생이나 학부모는 우리의 대학생이나 학부모와는 생각이 다르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다 중도에 포기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엄청나게 실망하여 극구 반대할 것이다. 대학 졸업을 못하면 평생 다른 사람 밑에서 지지리도 못난 삶을 살 것이라고 큰소리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이 곧 인생의 성공이란 등식이 단단하게 성립되어 있는 한,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학력 철폐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은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 끝까지 견디어야 하는 눈물겨운 노력을 강요당하고 있다. 참고로 프랑스 대학 교육은 거의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원 취업이 되었다는 신문 기사는 추측하건대 다른 선진국에서는 웃음거리가 될 만한 기사다. 대통령이 고교 졸업생의 취업을 걱정하고, 장관이 고교 졸업자 취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교과부 내에 ‘취업 컨트롤타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고, 도지사가 팔을 걷고 나섰다는 뉴스는 어찌 보면 우리의 학력 위주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부모들이 경제적 능력이 허락하는데도 과연 누가 자식을 고교만 졸업시키려고 하겠는가. 텔레비전 한 뉴스 멘트는 우리 사회 교육에 대한 정곡을 찌르고 있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충분히 보람을 느끼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려면 학벌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특성화고는 우수한 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사회와 기업은 이런 인재를 제대로 대우해 주는 풍토를 조성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사회 풍토, 사회적 인식이 확립되지 않는 한 무조건 대학에 입학하고 보자는 수험생들의 인생 전략 부재의 눈물겨운 시도는 지속될 것이다.
학벌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씨족 중심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학문에 매진하는 선비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여 당장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식구들이 궁핍해도 모든 집안 살림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는 남편 선비가 용납되는 사회였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라는 뜻을 지닌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이렇게 생겨났다. 이런 선비는 요즘 같으면 무책임한 남편으로 당장 이혼감이다. 그렇다고 전통적으로 학문과 선비를 중시하던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또 소수의 인사가 학력의 철폐를 부르짖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학벌 위주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캠페인도 필요하다. 이력서에 학벌을 적는 난을 없애고 전적으로 본인의 특성과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학벌에 따른 급여의 차이도 줄여야 한다. 아울러 학벌에 대한 인식 구조가 변해야 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학벌이 낮다고 얕잡아 보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학벌로 인해 스스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학벌주의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 이러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하는 추세긴 하다. 언론이나 텔레비전에서 학력보다는 능력이라는 기본 바탕을 전제로 명장(名匠)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고 드라마에서도 고교만 졸업하고도 능력을 발휘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독일의 직업교육제도를 본떠 마이스터고를 만들어 실행하고 있다. 기술 명장의 양성을 위해 마이스터고로 지정된 고교에서는 졸업생 전원의 취업을 목표로 한다. 이 역시 특목고처럼 애초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신이 있긴 하지만 여하튼 이러한 발상이 대두된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실질적인 실효를 거둔다면 학력주의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적성도 중요하고 사회적 풍토와 인식도 중요하다. 사회 풍토가 바뀌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면 학력을 좇기보다는 자신의 취향과 적성에 맞는 즐거운 직업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 번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면담한 적이 있다. 지방의 인문 명문고 학생인데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입시를 불과 몇 개월 앞둔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부모의 말에 따라 온전히 공부에 매진했지만 연기를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몇 가지 방향만 제시해 줄 뿐 뾰족한 수가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3개월 후에 그 학생을 다시 만났다.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대도시의 연기학원에서 연기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연기를 배워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간단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어요.”
개인의 능력이 잘 발휘되는 사회는 무궁한 발전의 잠재력을 지닌 사회다. 개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분야에 몰두한다면 그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가 될 수 있다. 또 본인이 원하는 일이므로 즐겁고 유쾌하게 일할 것이다. 그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얼마나 밝고 행복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