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능 중 대인관계 측면에서 두드러진 것이 공격 본능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개념을 발달시켜 생의 본능인 에로스(Eros)와 죽음의 본능 혹은 공격 본능인 티나토스(Thanatos)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역사를 보거나 우리의 일상을 둘러보아도 인간에게는 분명 공격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항상 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마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영원할 것이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벌인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공격 본능의 욕구가 숨어있다. 공격 본능이 있는 인간에게 전쟁과 같은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직접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면 간접 싸움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기도 한다. 로마 시대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거행된 목숨을 건 검투사들의 혈투를 보며 관중은 열광하였고 현재에도 레슬링이나 복싱 같은 격투기 경기는 매우 인기가 높다. 텔레비전 스포츠 채널은 격투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고 젊은 팬들은 피 터지게 싸우는 선수들에 열광한다.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싸움은 인간의 공격 본능을 대리만족 시켜주고 있다.
스포츠 해설을 듣다 보면 섬뜩한 전쟁 용어들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막강한 화력, 치열한 공방전, 일제 사격, 혈투, 대포, 소총, 아군, 적군 등 스포츠와 관련된 어휘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스포츠 역시 그 기저에는 공격 본능이 숨어있는 것이다. 전쟁을 모방한 서바이벌 게임도 인기가 높다. 상대방을 향한 날카로운 공격은 길거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차를 세워놓고 갈기를 세우고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는 모습은 상황만 허락한다면 곧바로 육탄전을 감행할 태세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처음 만나면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키를 재거나 악수를 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상대방의 힘을 파악하려 한다. 야만의 시대였다면 두 남자는 잔뜩 허리를 숙인 채 서로를 노려보며 원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만이 아닌 문명 세계에서 인간은 폭력적인 본능을 다스리고자 노력하여 왔다. 그중 하나는 티나토스를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배출시켜 공격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 방식에는 위에서 말한 스포츠도 있겠고 제의식이나 예술 행위가 있을 것이며 집단 놀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놀이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형제들 간의 싸움이다. 아마도 성장하면서 가장 많이 싸우는 사람은 형제일 것이다. 그것은 생존본능을 위해 형제간에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형제가 많을수록 숱하게 싸웠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형제간의 싸움은 끝을 보지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수위 조절이 가능하며 그것이 안 될 때는 부모가 개입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싸웠다고 원수를 지거나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많이 싸울수록 더욱 친해지는 이상한 역학관계가 형제의 싸움인 것이다. 조절이 가능한 형제간의 싸움은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티나토스를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도록 해 준다.
잘 싸우는 것은 자주 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알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 동물을 연구하여 인간 행동에 적용하고자 한 로렌츠(Lorenz)는 공격적인 행동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싸움은 동일한 종 사이에서 훨씬 자주 일어나는 것(동종공격)으로 공격 본능은 종과 개체를 보존시키는 기능을 한다. 하긴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보면 어미 사자를 따라다니는 새끼 사자들이 장난치듯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할퀴고 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새끼들의 장난에 가까운 싸움은 훗날 형제들이 장성하여 자신의 영토 확보 하도록 하고, 싸움을 통해 강한 정도를 가림으로써 건강한 종족 보존을 가능하게 하며, 훈련된 공격성으로 스스로와 자손을 보호하는 순기능이 있다. 사자 새끼들의 싸움은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관점에서 바라본 공격 본능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형제끼리의 싸움은 프로이트 입장이든 로렌츠 입장이든 간에 긍정적인 측면이 상당하다. 만일 이들의 이론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형제의 싸움은 정서 조절, 대인관계 형성, 협상의 기술을 익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익힌 싸움의 기술은 장차 사회에서 유익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주요 학습이 될 것이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던 중 텔레비전에서 열세 명의 자녀가 있는 가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자녀가 많은 가정을 재미있게 구성하여 텔레비전으로 내보내는 것을 보니 인구 감소로 인해 정부가 매우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 방송을 보면서 나름 주목한 것은 23살 된 제일 큰 아이부터 채 백일이 되지 않은 막내 사이에서 형성된 아이들 간의 관계였다. 아이들은 서열에 따라 부모가 정해준 집안일을 맡았다. 청소하는 아이, 빨래를 너는 아이,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아이 등...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능숙하게 우유를 타서 백일도 채 되지 않는 막내에게 우유를 먹이는 장면도 있었다. 한 가족 열세 명의 아이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내둘렀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아이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열세 명 아이의 부모는 힘든 기색이 별로 없었다. 물론 처음에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서너 명이 되었을 때 힘든 정도가 정점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아이가 열 살을 넘기고 집안일을 거들거나 엄마를 돕게 되면서 서서히 힘든 정도가 약해졌을 것이다. 그때부터 부모는 기본적인 것들만 챙겨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서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부모 둘이 열세 명의 아이를 일일이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열세 명의 아이 중 누구는 챙기고 누구는 방임할 수도 없다. 적당한 선에서 관심의 수위를 고르게 할 수밖에 없다. 그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어울려 자연스럽게 해결해야 한다.
방송에서 열세 명의 아이는 서열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각각 최선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서로 협력하면서도 기회가 생기면 그들은 재빠르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아이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어른들에 비해 간단하다. 아이들에게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의 해결이 가장 우선시된다. 이것은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설 중에서 맨 하위의 생리적 욕구에 해당한다. 매슬로우는 하위 욕구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어야 그다음 안전의 욕구 단계로 넘어간다고 주장했다. 생리적 욕구는 이를테면 생명 유지에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공기, 음식, 음료, 주거, 난방, 생식, 수면 등이다. 방송 속의 아이들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 살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식탁에 늦으면 먹을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누가 부르지 않아도 식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며 수저를 들고 앉아 있었다.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밥 먹으라고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르는 일은 없다. 그럴 필요조차 없다. 이 아이들은 먹여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먹는다. 서로 먼저 먹으려고 아우성친다. 상 앞에 둘러앉은 아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알아서 생리적 욕구를 채우는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음 단계인 안전 욕구나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로 넘어갈 것이다. 상을 차려놓고 아무리 외쳐 불러도 대답 없는 아이, 식사 시간마다 잘 먹지 않는다고 난리를 치르는 외동아이의 식탁에 비해 얼마나 건강한 식탁인가.
형제가 많은 아이와 외동아이를 비교해 보는 것은 재미있다. 열세 명의 형제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열 살만 되어도 갓 난 동생에게 우유를 먹인다. 외동아이라면 이러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열 살짜리 외동은 쓰레기 버리기는 물론 빨래를 널거나 집 안 청소에 도움을 주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제 방도 제대로 정돈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눈치를 챘겠지만, 두 아이를 비교하는 것은 일찍부터 사회성을 체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홀로 살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학습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사회 속에 던져졌을 때 누가 더 잘 적응할 것인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형제들과 싸우고 찧고 까불고 어울리면서 소통의 기술과 사회성을 배운다는 사실에서 형제의 싸움에는 제법 그럴듯한 자연 교육이 숨어있는 것이다. 어느 학교나 훌륭한 교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이 경험적 학습은, 어떤 때 양보하고 어떤 때 주장해야 하는지 몸소 체득하면서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 소중한 기회를 제공받는다.
‘싸우면서 큰다’는 말이 있다. 사회성, 대인관계, 상호 관계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는 기가 막힌 말이다. 한 가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자랄 때 아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갈등과 화해의 변주를 연주한다. 큰 놈한테 얻어맞은 작은놈은 감정이 상해 울음을 터뜨린다. 속상한 작은놈은 엄마한테 이르지만 소용이 없다. 자기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아이는 눈물을 삼키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본다. 확실한 자기편이 누구인지 따져보기도 하고, 정당성이 없이 싸워서는 자기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알게 된다. 형제 싸움에서 패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것은 장차 사회생활을 위한 최적의 적응 훈련이다. 형제 싸움에서 져보는 경험은 어린아이에게 성장을 위한 최적의 교훈이자 훈련이다. 억울함, 분함, 슬픔 같은 감정을 순식간에 느끼면서 감정 조절 능력도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싸움이란 최소 두 사람이 갈등을 겪을 때 일어난다. 갈등은 감정으로 전이되어 분노의 감정이 생겨난다. 분노의 감정이 심화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화산처럼 폭발하여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도가 넘는 싸움은 사회의 제재를 받는다. 감정의 조절과 통제가 안 돼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고 싸우려고만 드는 사람이 있다면 장차 사회에서 상당히 곤란을 겪게 된다. 이런 점에서 형제의 싸움 경험은 미래를 위한 학습의 장이 되는 것이다. 형제들과 힘껏 싸워본 사람은 감정도 표출할 줄 알고 화해도 할 줄도 알며 상황에 맞는 타협점을 찾을 줄도 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순응과 억제에 익숙한 사람, 감정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다.
자~알 싸우면 그 자체로 감정을 정화할 수 있으며 화해와 상생의 방법도 깨닫는다. 싸우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싸우고 난 다음이다. 싸우고 나서 두 사람의 갈등 골이 더욱 깊어졌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반대로 마음이 후련해졌다면 그 싸움은 긍정적이다. 정화, 화해, 타협, 상생의 기술을 익힐 수 있는 형제의 싸움은 긍정적인 싸움이며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돈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상대가 없는 외로운 아이는 언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싸움에서 극단적일 수 있다. 싸움이 인류 발달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로렌츠의 주장은 이 점에서 맞닿아 있다.
핵가족의 환경에서 성장한 현대인은 싸움의 기술이 약하다. 싸움은 현대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지만 야만의 시대처럼 마음 놓고 싸울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문명과 교육과 사회의 제약으로 애써 싸움을 자제해야 하는 현대인이야말로 본능을 제어당한 슬픈 유목민이다. 어릴 때 애지중지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이들은 기회만 닿으면 자~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자주 싸우려 들지도 모른다. 말을 타고 푸른 초원을 질주하며 괴성을 지르던 건강한 싸움 대신 자동차를 몰고 정해진 길을 외롭게 달리는 사람들, 긍정적인 싸움으로 감정을 마음대로 발산할 수 없는 현대인은 차창 밖을 향해 무의미한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는 슬픈 사람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