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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못된 사람이 되자

by 인산 Mar 28. 2025

우리말에서 “착하다”는 매우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 아이는 참 착하다.” “그 사람 착하다.”는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어려운 일도 도맡아 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착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대인관계도 좋고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착하다는 영어 good으로 해석된다. 착한 아이는 good child로 착한 남자는 good man이 된다. 그런데 영어에서 good은 착하다의 의미뿐 아니라 좋은, 친절한, 유능한 등의 뜻도 있다. 운이 좋다든가 책이 매우 유익하다든가 할 때 쓴다. 아울러 훌륭한, 진짜의, 즐거운, 친밀한의 뜻도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good의 의미 가운데 좋은, 친절한 정도가 우리말의 착하다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착하다는 마음이 곱고 어질다, 선하다의 뜻이 있어 good과는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일상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착한 아이, 착한 사람은 순종적인 사람 혹은 순순히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다. 착한 사람은 마음이 곱고 선하여 남에게 대항하지 않고 화도 잘 내지 않으며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착한 학생은 교사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르는 학생이다. 시키면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학생이다. 불만이 있더라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삭일 줄 아는 학생인 것이다. 집안에서 착한 딸은 부모에 순종적인 딸이다. 힘든 일을 맡겨도 싫다 좋다 군소리 없이 해내는 딸은 부모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good의 반대는 bad다. bad는 나쁜, 서투른, 틀린, 불충분하다의 의미가 있다. 우리말에서 ‘못된’은 bad의 나쁘다의 의미와는 약간 다르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저지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지만 못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 정도의 뜻이 있다. 자의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못된 놈’, ‘못돼 먹었다’의 표현에는 어느 정도 애정이 들어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착한 사람은 남에게 친절하고 남이 부탁하면 결코 ‘노’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경우에 따라 약간 모자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암튼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절대 싫어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언제나 부탁할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기보다는 남을 우선하는 상태가 지나치면 심리학 용어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불리는 콤플렉스를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어렸을 때 눈치를 보면서 자란 사람,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람은 남으로부터의 비난을 견딜 수 없으며 항상 칭찬받기를 바란다. 하긴 거절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수용하는 사람을 비난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여럿이 어울리다가 혼자 되었을 때, 외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배출한다는 사실이다. 항상 사랑받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자신을 억눌렀던 것을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쏟아내기 시작한다. 남 앞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참아야 했던 못난 행동을 스스로 비난한다. 자기에 대한 비난이 심해지면 우울증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비난하다가도 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습관적으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증상이 생겨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속상해하는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태도에 매우 예민하며 눈치를 잘 본다. 또한 피해의식이 강하고, 대인관계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어 쌓인 감정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버리기도 한다.      


착한 아이가 되기를 강요하는 문화     


한국문화는 전통적으로 착한 아이가 되도록 강요하는 편이다. 대체로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는 자신의 의견을 섣불리 말할 수 없도록 하고, 불만이 있더라도 꾹 참고 견디기를 강요한다. 가정에서 아버지와 같은 권위자에게 순종해야 하고 자신을 억제해야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학교에서 타의 모범이 되고 선생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직장에서 상사의 의견을 존중해야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는 착한 아이가 되도록 이끌었다. 말대답을 하면 불충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른이나 상사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해도 잠자코 있어야 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부터 “어른이 말할 때 나서지 마라”, “따지지 마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등을 교육시켰다. 이러한 교육 방식과 자신을 제어하는 훈련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양산한다.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 웃어른을 공경하고 최대한 예를 다하여 모시는 것은 아름다운 관습으로 꼭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경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을 정당하게 말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어른 또는 상사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바람직한 사회적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     


과거 한국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까닭도 이러한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서로 의견이 다르면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문화는 매우 위험하다. 민주주의의 꽃인 토론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므로 토론 주제에 대한 시각도 다를 수 있다. 그런데 평소에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서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면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나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해서 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토론의 주제에 있어 서로 의견이 다를 뿐 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말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해야 하며, 지위가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수직적 분위기에서 토론에 대한 반대는 곧 나에 대한 반대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성적인 토론이 되어야 할 장에서 종종 감정이 격해지고 멱살을 잡는 경우도 생겨난다. 겉으로 냉정한 척 해도 속으로 두고 보자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토론 풍토는 설령 자기 의견이 있더라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변질된다. 상대방을 맹비난하면서 실컷 싸우다가도 토론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악수하고 떠나는 서양의 토론 문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격해지는 한국의 토론 문화를 빗대어, 한국인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있다. 나와 다르면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정당을 지지하는데 너는 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고 따지면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름,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토론 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짬뽕과 짜장면     


집단문화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양산한다. 집단에 소속된 이상 개인의 개성을 죽이고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야 한다는 집단문화는 위험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의 집단문화는 음식점에 가더라도 똑같은 음식을 주문해야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는다. 나는 짬뽕을 먹고 싶지만, 나 외에 모두가 짜장면을 주문했기에 나 역시 메뉴를 바꿔야 한다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다. 각자 음식 취향이 다르고 그날의 몸 상태도 다른데 왜 남들과 똑같이 먹도록 강요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착한 아이는 이러한 통일 메뉴에 대해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냥 따라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렇듯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개인의 다양성보다 집단의 단일화를 중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군대와 같은 엄격한 계급 체계가 요구되는 조직에서는 착한 아이가 필요할지 모른다.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면 자기주장은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요구하는 조직에서 자꾸 손을 들어 질문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군대는 특수한 조직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단체 경기에서 똑같은 유니폼으로 소속감을 나타내는 선수들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위치에서 엄격한 조직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다양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엮어진 사회에서 이러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엄격한 조직은 곤란하다. 전부 짜장면을 시켰다고 해도 나는 짬뽕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음식점에서 새롭게 개발한 메뉴 짬짜면은 착한 아이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짬뽕과 짜장면 사이를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 개발된 짬짜면의 그릇 속에는, 자기주장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문화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여전히 독불장군식의 사고와 행동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명이 음식점에 들어가 메뉴를 정한다고 하자. 지나치게 다양한 메뉴를 주문하면 주인이 짜증 낼 것이라고 눈치 보는 사람은 착한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착한 아이는 메뉴를 한두 가지로 통일하라고 권할 것이다. 이때 조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속으로는 통일하고 싶지 않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메뉴에서 통일된 메뉴로 바꿀 것이다. 그러니까 짬짜면은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 메뉴의 통일을 외치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선택하기보다는 어렴풋하게 뭉뚱그려 놓은 짬짜면은 꼭 통일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약간의 변화와 그럼에도 여전히 나보다는 남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잔영을 보여준다.     


건강한 거절은 필요하다     


착한 아이는 피곤하다.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속으로는 거절하고 싶지만, 겉으로 거절을 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의 내면에는 분노가 쌓여간다. 자기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남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쳐야 하는 아이가 착하다고 인정받는 사회는 병든 사회가 될 위험이 있다. 착한 아이, 착한 사람은 겉으로는 순한 사람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 찬 사람이다. 짖지 않는 개가 갑자기 달려와 물어버리는 것처럼, 착한 아이는 말없이 잘 따르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하여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때때로 못된 아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못된 아이는 상대방이 요구할 때 거절할 수 있는 아이일 것이다. 상대방 앞에서는 ‘예스’를 외치다가 집에 돌아와 자책하며 가슴을 치는 것은 결코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거절을 잘할 수 있는 사회, 거절을 당해도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회, 가끔은 못된 사람이 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개인으로 구성된 건강한 사회다. 거절을 잘한다는 것은, 스스로 기꺼이 하기를 원할 때는 진정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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