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강한 남자, 추진력이 있는 남자를 이상적인 남자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 문장을 과거형으로 썼지만, 사실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 우리 사회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의 신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군사정권과 맞물려 강력한 경제 드라이브를 걸던 시절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일을 결국 해내고야 만 경제 전사들의 에피소드는 오늘에도 훌륭한 성공 사례로 회자하고 있다. 그래서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할 수 있다”라는 말들과 함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특히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구호였다.
이러한 집단 문화적 구호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군대 같은 극단적인 집단문화에서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강한 남자의 표본과도 같은 글귀다. 굳건한 정신력으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의미로, 이는 어쩌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일어서야 했던 가난했던 과거에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구호는 그대로
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했다. 변해도 한 참이나 변했다. 한국 사회는 개방되었고 모든 부분에서 수준이 향상되어 세계 선진의 복지 국가를 운운할 정도다. 그럼에도 한 구석에는 여전히 “안 되면 되게 하라”, “할 수 있다” 같은 구호들이 종종 눈에 띈다. 강한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안 되면 안 되는 것이지,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되게 만드는 사회는 굉장히 위험하다. 깨끗이 포기할 줄 모르는 사회야말로 자칫 막가파 사회가 될 수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조직 사회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의 주범이다.
직장에서는 직원들에게 과도한 목표량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나이 든 임원들은 과거 시절을 떠올리며 젊은 사원의 나태함과 무능함을 한탄한다.
우리는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는데... 불가능이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생각이 틀려먹었어.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뭐가 부족하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말한다. 현재 젊은 세대는 보릿고개를 넘어본 적도 없고 굶어 본 적도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것보다 적당한 선에서 일을 마치고 가족이나 친구와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문화 활동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크게 먹고살 걱정도 없다. 주어진 일만 끝내면 개인적인 일에 더 우선권을 두는 그들에게 과도한 경쟁력과 추진력은 스트레스를 줄 뿐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와 같은 구호는 그들에게 죽을 맛이다. 어느 선까지 열심히 하고 성과가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최고가 되어야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란 말인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젊은 세대는 될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구슬땀을 흘리지도 않고 이것이 아니면 끝장이라는 배수진을 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젊은 사람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안 되면 안 되는 것이지 어쩌라는 것인가.
세대 간의 차이는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가져왔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가 부패 지수가 높았던 것도 이러한 마인드가 어느 정도 한몫을 했다. 어떤 목표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 목표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정식으로 접근하면 도저히 목표에 이를 수 없다. 그렇다면 뒷거래하는 수밖에 없다. 담당자에게 접근해서 안면을 트고 술대접도 하고 검은돈도 쥐여 준다. 이렇게 해서 일을 해결하면 능력이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하면 무능력자로 낙인이 찍힌다. 그러니 원칙주의 성격을 지닌 사람이나 내향적인 사람은 이러한 조직 사회에서 배겨 날 길이 없다. 삶에 대한 회의와 무기력에 빠져 우울증에 걸리거나 심하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안 됐다. 그러면 어쩔 수 없다. 다른 길을 모색해 보자. 바로 이런 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의 성격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특히 외향성과 내향성은 다양한 성격 유형의 기본이다. 많은 심리학자는 외향성과 내향성의 사람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집단이 분위기도 좋고 능률도 뛰어나다고 말한다. 정리 정돈을 잘하며 꼼꼼하게 챙기는 내향적인 사람과 사교술이 좋고 남과 쉽게 친해지는 외향적인 사람이 각기 성향에 따라 필요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다면 당연히 능률이 오를 것이다.
그래프가 벽에 붙는 순간, 사람은 지친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틀에 맞추는 획일성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목표를 할당하고 큼지막한 그래프를 그려 벽에 붙여 놓고 훤히 볼 수 있게 한다면, 목표 결과에 따른 서열이 명백히 드러난다.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래프의 활용은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일종의 행동주의적 기법이지만, 그 목표 도달에 이르지 못한 직원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매일 눈앞에서 펼쳐지는 초라한 자신의 그래프에서 자신감도 상실하고 자존감도 잃는다. 밥맛도 없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멍하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그래프만 바라보면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성과를 올리기도 쉽지 않다. 그래프의 일등 직원은 당장은 콧노래를 부를 것이지만 언제나 일등을 하리라는 법은 없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지 않는가. 일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역시 그래프가 스트레스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다.
직원들에게 스트레스 요인인 그래프 현상은 요즘 조직 사회 곳곳에 만연한다. 직접 그래프를 벽에 걸지 않더라도 더욱 교묘하게 경쟁을 부추기고 안 되면 되게 하라고 윽박지른다.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지만, 사회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마인드가 성행하고 있다.
구호 없는 사회가 더 따뜻하다
우리는 여전히 구호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지하철에 적혀 있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도 그렇다. 양심껏 자리를 양보하면 보기에도 좋고 양보한 사람이나 양보받은 사람도 흐뭇할 것이지만 구호 때문에 양보했다면 양보하고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동네 어귀의 멋진 돌에 새겨진 “정직하게 살자”나 “바르게 살자”도 그렇다. 아마 외국인이 봤다면 이곳에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생각할 것이다. 얼마나 정직하지 않게 살아왔기에 저렇게 큰 돌에 새겨 놓았을까. 이런 구호는 과거의 부정적 잔재라고 생각한다. 딸을 낳았다고 억장이 무너지고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이던 시대는 지났다. ‘자’나 ‘숙’ 등으로 끝나던 딸들의 이름은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한쪽에서는 빠르게 변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과거의 먼지가 그대로 쌓여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정당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도 용납이 되는 “안 되면 되게 하라”의 구호 대신 다음의 글귀는 어떨까? “최선을 다 해라! 아님 말고...”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됐다고 나무랄 수는 없다. 능력껏 최선을 다했다면 꾸중을 해서는 안 된다. 과정보다 결과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삭막하다. 경쟁심만 부추기는 인정 없는 사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과 지상주의가 아닌, 과정 존중의 문화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과연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그에 걸맞은 삶의 태도를 생각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