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국의 전통 공간은 자연 공간을 지향한다. 가능한 인위성을 배제했다. 전통의 한옥을 짓기 위해 기둥을 세우거나 서로 연결할 때도 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돌담을 쌓을 때도 돌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한다. 대개는 맨손으로 쌓는다. 있는 그대로의 돌을 손으로 만지면서 쌓은 돌담은 친숙하면서도 안정적인 자연스러운 돌담이 된다. 안도 아닌 것이 밖도 아닌 마루라는 공간도 그렇고, 내부도 아닌 것이 외부도 아닌 마당이라는 공간도 매우 특이한 우리의 전통 공간이다. 담의 높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담은 자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웃과의 소통을 단절하지 않는다. 사람 키 크기만큼인 담의 높이는 지나가던 사람이 담 안을 볼 의향만 있다면 얼마든지 안을 바라볼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담은 이웃의 의지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역동적인 높이를 하고 있다.
다용도 공간
우리 공간의 특징은 다용도의 보자기와 비슷하다. 용도에 따라 구획되어 있는 가방과는 달리 보자기는 무엇이라도 쌀 수 있는 용기가 된다. 가방에는 책을 넣는 곳과 필통을 넣는 곳이 구분되어 있지만 보자기에는 구분이 없다. 책을 싸면 책보가 되고 옷을 싸면 옷 가방이 되고 떡을 싸면 떡보가 된다. 가방은 크기가 정해져 있어 정해진 용도에 따라 사용해야 하지만 보자기는 무궁무진한 공간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보자기의 개념은 우리 안방의 공간 개념과 유사하다. 손님이 방문을 하면 안방은 거실이 되고 안방에 상을 펼치면 식탁이 되며 저녁이 되어 이불을 펼치면 침실이 된다. 한 마디로 서양인이 구분하는 식탁과 침실이 가방의 개념이라면 우리 안방의 다양한 용도는 보자기와 같다. 그러나 아파트가 보편화되고, 우리의 몸과 생활이 그 편리함에 익숙해지면서 이러한 전통적 공간 개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한편으론 한국인의 무의식에는 여전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에도 여전히 다용도실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여름 휴가철에 한국인들의 필수품 중 하나는 깔판이다. 나무 아래 깔판을 깔면 그곳은 침실이 되고 식탁이 되고 놀이판이 된다. 깔판 위에서 수박도 썰어 먹고 고스톱도 치고 한쪽에서 아이는 낮잠을 잔다. 서양인이 휴가를 떠나기 전에 의자며 식탁 등을 챙기느라 골머리를 앓는 것에 비하면 한국인의 휴가철 짐은 단순한 편이다. 이처럼 한국인이 추구하는 다용도 공간은 환경친화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 공간이 되면서 이러한 다용도의 활용이 가능한 자연스러운 공간의 개념이 훼손되었다.
더불어 공간을 사용하기
요즘의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방을 따로 쓴다. 한 집에 한두 명의 아이밖에 없으니, 혼자만의 방을 차지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한 방에서 온 가족이 살거나 적어도 형제들이 함께 방을 공간을 공유하던 일은 먼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 아이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혼자 방을 쓰고 싶다는 대답이 많았다. 지금은 비교적 넉넉한 주거 환경에서 아이 한 명이 하나의 방을 사용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익히게 되었다. 자기 방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기분이 나쁠 때는 문을 잠그기도 한다. 형제나 자매가 방을 공유하던 시절에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한 공간에서 여러 명이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수련회를 가거나 기숙사나 군대처럼 집단생활을 하면 대부분 방을 공유한다. 한 공간에서 생활할 때 그들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규칙이 생겨난다. 자기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크게 틀어 놓고 들을 수 없다. 초저녁잠이 많은 룸메이트가 있다면, 책을 보기 위해 환하게 불을 밝히려면 눈치를 봐야 한다. 옷을 벗어서 아무 데나 던져놓을 수도 없다. 아무튼 뭔가를 하려면 룸메이트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처럼 공간의 공유는 자신을 억제하고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장이다. 나만 알고 나만을 생각해서는 다른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가족으로 살면서 공간을 공유하면서 몸에 익히던 규칙과 남에 대한 배려는 아파트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갖게 되면서 사라졌다. 열린 공간은 닫힌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공간의 폐쇄는 우리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한국인의 유전자에 스며있는 무의식에는 여전히 열린 공간이 자리하고 있지만 몸은 닫힌 공간에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전통과 현재의 불균형은 아이들에게 과도기적 방황을 유발하고 혼란에 빠트릴 가능성이 있다. 혼자만의 방에서 아이들은 인터넷 중독에 빠지거나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수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에서도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공간의 용도가 변화하면서 아이는 부모나 형제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시간도 줄었다. 휴대 전화, 인터넷, 텔레비전 등으로 가뜩이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는데 공간의 형태마저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만일 우리 아이들이 전통적인 공간에서 충돌하고 화해하고 배려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면 아파트식 공간은 곤란하다.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열려있는 공간, 다용도의 공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의 아파트 비중은 전체 주택 중 무려 62%로 매우 높은 비율이다. 다른 선진국의 경우 아파트의 인기가 시들해진 지 오래다. 미국인은 단독 주택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며 유럽인들도 친환경·생태주택이 인기가 높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파트 평수를 중히 여기는 경향이 크다. 아파트 환경에서 아파트로부터 부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거주 공간이 휴식과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타인과의 힘겨루기의 양상으로 변하면서 그곳은 경쟁적인 공간, 불안한 공간이 되었다. 행복의 공간이어야 할 집이 남과 비교하는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편안함 대신 비교와 과시, 불안감을 주는 공간에서 안정적인 자녀 출산과 육아는 힘들다. 노동에 지친 피곤한 몸이 편안한 주거지에서 휴식과 안락함을 느낄 때 부부의 정은 더욱 깊어지고 자녀 출산에 대한 욕구도 왕성해진다. 그러나 이웃과 단절되고 천편일률적 구조를 지닌 아파트 공간은 몸을 위축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파트 주거 환경이, 우리 가정이 소자녀로 재빠르게 전환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아파트를 없애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공간을 만들기도 어렵다. 그럼 어떠한 방안이 있을까. 앞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새로 짓는 아파트는 환경친화적이며 생태적이고 다용도 활용이 가능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 공간의 개념을 기반으로 함께 나누는 공간, 인위성이 배제된 자연적인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성이 강조된 공간
자연성은 특히 한국의 건축에서 매우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건축미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대자연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연못이나 정원의 경우 인위성이 강한 이웃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가능하면 인위성을 감추려고 한다. 이를테면 연못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연못인지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못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위와 조화를 이룬다. 예쁜 인공적 분재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일본 정원이 처음에는 눈에 띌 수 있으나 천연 계곡을 쏙 빼닮은 아름다움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모방할 수 없는 자연미를 소중하게 생각한 한국인은, 공원을 조성할 때도 가능한 인위성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한다. 한국인에게 자연미는 단순히 외적 환경만을 의미하지 아니다.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한국의 씨족사상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으며, 인간으로서 스스럼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연적인 체계였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로 하루하루가 새로워지는 요즘 전통을 고수하며 살 수는 없다. 한국인의 유전 인자를 되새김질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현대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룰 방안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건축 전문가는 획일적이고 인위적인 아파트 공간을 좀 더 생태적이고 자연적인 주거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한다.
자연성을 추구하는 한국의 전통 사상에 비추어 덧붙일 말이 있다. 손기술이 세계적으로 최상위인 한국인은 자동차, 반도체, 휴대 전화 등 여러 기술 분야에서 세계의 첨단을 걷고 있다. 그런데 우려되는 기술은 바로 성형이다. 외국 사람들이 성형을 위해 한국의 성형외과를 찾을 정도다. 한 일간지에 ‘한국 성형 기술 배우자 중(中) 방문단 러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하지만 몸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성형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자연 사상과는 어긋난다. 부모가 물려준 몸을 훼손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외적인 몸을 예쁘게 가꾸는 것은 폐쇄된 아파트 공간 문화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쌓아 올린 돌담은 강한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돌담처럼 인공이 아닌 자연의 얼굴로 자신 있게 표현할 때 그 사람만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지 않을까. 텔레비전의 미녀들을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것 같아 구별하기가 힘들다. 타고난 개성을 지닌 미인이 환영받는 사회, 성형하지 않은 얼굴이 더욱 가치를 부여받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획일성을 벗어나, 생태적이고 다원적인 공간을 지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성형이라는 인위적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경향은, 자연성을 중시하던 전통 공간보다는 인공적이고 폐쇄적인 아파트 공간에 더 익숙한 현대인의 감수성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놀이터와 골목길
한국의 주 거주 공간이 아파트가 되면서 공동 공간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아파트 관리소 건물에 노인정과 부녀회가 들어섰으며 아파트 단지 내에 놀이터가 생겨났다. 과거 학교 운동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어린이 놀이기구가 아파트 단지 안에 설치된 것이다. 움직임이 적고 수동적인 노인들이 친목을 다지는 노인정과는 달리, 외부에 설치된 놀이터는 전통 공간의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놀이와 터가 결합한 놀이터는 아이들이 노는 마당이다. 그런데 아파트 놀이터는 아이들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면서 노는 동안 엄마들이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파트 한가운데 자리한 놀이터는 예전의 빨래터처럼 전통적 소통의 장소인 것이다.
아파트에 놀이터가 있다면 개인주택들 사이에는 골목길이 있다. 동네 아이들이 어울려 놀던 곳, 그들 중 우두머리는 골목대장으로 불리던 시절, 골목길은 아이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미로와 같은 한국의 골목길은 놀이터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골목길은 집 내부도 아닌 것이 외지도 아닌 것이,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차들이 다니는 큰길과 집을 연결해 주는 좁은 통로이자, 대문을 열면 바로 만나는 공간으로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은 온전히 사람들 차지였고 특히 아이들이 주인행세를 하였다. 골목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동의 장소로, 아이들은 공평하고 평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골목길의 공간은 나름대로 관계가 형성되는 일종의 작은 사회다. 골목길에서 상호관계는 주먹과 힘의 논리로 형성되기도 한다. 부모나 주머니의 힘이 아니라 싸움 대장이거나 형제가 많은 집 아이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골목길은 그냥 스쳐 지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그만 통행로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사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우정과 배신과 협력을 배우고, 사회성을 배우고, 자아를 형성해 간다. 인위적이고 문명적 서열이 아닌 원시적이고 자연적 서열이 매겨지는 곳, 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습득하는 곳, 갯벌처럼 생명이 숨 쉬는 그곳이 바로 골목길인 것이다.
많은 한국인은 어릴 적 학습의 장이자 신나는 놀이터였던 골목길을 그리워한다. 이런 점에서 아파트의 놀이터가 골목길의 기능을 재생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파트 놀이터가 생명이 숨 쉬는 역동적인 골목길의 역할을 한다면 아파트는 지금보다 훨씬 아늑하고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 될 것이다.
전통 공간과 사적공간
현대 연극 중 ‘In-yer-face 연극’이 있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국의 극작가 사라 케인(Sarah Kane)의 작품 등을 한데 묶어 부르게 된 ‘In-yer-face 연극’은 배우들이 관객을 마음껏 조롱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폭력, 섹스, 마약, 칼, 피, 상한 음식, 쓰레기, 욕설 등이 난무한다. 그런데 면전에서 약 올리기의 뜻이 있는 ‘In-yer-face 연극’은 면전에 들이대는 연극, 소위 면전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심리적 구역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주는 ‘In-yer-face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은 극도의 불편함을 느낀다.
대체로 우리는 타인이 자신 얼굴의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사적공간이 침해당하는 불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우리 한국인의 사적공간의 개념은 서양인보다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편이었다. 개인적인 공간보다는 나누는 공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별 다른 생각 없이 불쑥 남의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파트에서의 안내방송이 그렇다. 단수 안내를 위해서 혹은 주차 문제로 이따금 경비실에서 방송을 하는데 시도 때도 없는 경우가 많다. 서양에서 이런 안내방송을 한다면 까무러칠 만한 일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방송은 소음 공해다. 지하철이나 기차에서도 그렇다. 꼭 필요한 간단한 안내 멘트만 하는 서양의 지하철과는 달리 한국의 지하철은 “자리를 양보해라”, “예의를 지켜라” 등등 과도하게 친절한 그러나 시끄러운 멘트를 남발한다. 이 역시 사적공간에 대한 개념이 미약해서 나온 것이다. 남에 대한 간섭 또한 사적공간의 개념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이웃과 허물없이 지내며 일을 도와주었던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 주거 문화가 대세인 요즘 지나친 간섭은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 간의 다툼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요즘, 간섭 문화가 긍정적인 어울림의 문화로 승화되지 못하면 시비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과거 한국 사람인은 어렸을 때 엄마의 따스한 등을 느끼면서 컸다. 등에 업힘으로써 스킨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여학생이 친구와 손을 잡고 다니는 현상이나 남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은 어릴 적 스킨십의 결과이자 사적공간이 분명하게 구획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한국 이민자가 어린 남자아이의 성기를 만지다가 성 학대로 고발을 당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역시 사적공간에 대한 문화 차이에서 생겨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한국인의 주거 주지인 아파트는 사적공간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간섭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닫혀있는 철문은 아파트의 표본이다.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옆집과 교류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이었지만 이제는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에서 만나도 서로 등을 돌린 채 말없이 폰만 바라본다. 예전에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었다. ‘이웃사촌’인 그들과 많은 것을 나누며 살았다.
전통 공간은 자연성이 강조된 열린 공간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닫힌 인위적인 공간에 살고 있다. 만일 우리 아이들이 ‘몸은 현실 마음은 전통’이라는 모순에 처해있다면, 어쩐지 썩 행복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