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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에세이

by 인산

나를 솔직히 표현한다는 것은 자체로 건강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표현이 억압되어 있다면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점에서 표현행위인 예술은 삶에서 중요하다. 농업이나 어업 같은 일차산업과는 달리 예술은 곧장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 예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차려주지는 않지만, 예술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야만적 상태의 동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배가 부른 다음 여가로써 행하는 문화 활동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본능이며 필수적인 행위다. 예술의 중요한 기능은 누가 뭐래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표현의 달인인 예술가는 자기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엄청나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전해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자기표현에 대한 교훈을 전해 준다. 여러 버전으로 전해오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이발사가 있었다. 그는 직업상 우연히 나라의 가장 큰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임금님의 머리를 깎기 위해 궁궐로 가기 전까지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이발사였다. 그러나 임금님이 머리를 깎기 위해 귀까지 덮은 모자를 벗은 순간, 이발사는 운명적으로 커다란 걱정거리에 휩싸이게 된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라는 천하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이발사는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절대로 발설할 수 없었다. 비밀을 발설한다면 큰 벌을 내리겠다는 임금님의 경고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입을 잘못 놀리면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해가 될 것이 때문에 그는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직업상 알게 된 비밀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직업윤리라는 것이 있다. 직업상 타인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직업윤리의 주요 항목이다. 성실한 이발사는 직업윤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감히 당나귀 귀를 말할 수 없었다.


머리에서 빙빙 맴돌고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밀을 억누르다 보니 이발사는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무엇인가를 가슴에 담아둔다는 것은 물이 고여 있는 원리와 같다. 물이 고여 있으면 썩듯이 가슴에 담아 둔 비밀은 단단한 돌덩이가 되어 이발사의 오장육부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렸다. 그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자신이 조만간 죽을 것을 알게 된 이발사는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죽어서도 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갈대밭을 찾아갔다. 그는 갈대밭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발사의 처절한 외침은 갈대밭을 향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이발사의 마음을 알았는지 갈대들이 서로를 비비며 흔들어 댔다. 실컷 소리를 지르고 나자 이발사는 가슴이 후련해졌다. 이제는 편히 죽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첫째, 이발사의 고함은 산 정상에서 외쳐대는 야호 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슴 후련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죽을병에 걸릴 만큼 콱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이발사의 외침은 심리적·신체적·사회적 경쟁의 질주로 숨 쉴 틈이 없는 현대인, 공간적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느낌을 받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외침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없는 현대인이야말로 이발사처럼 스트레스와 만병의 근원을 안고 살아가는 안쓰러운 사람이다. 학교, 직장 등 선후배 혹은 직책이라는 엄격한 계급으로 구성된 현대 사회는 제대로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어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나 만일 이발사가 갈대밭이 아니라 비밀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는 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비밀이든지 말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나 있다든가 아니면 아내와 원활한 관계였다면 그는 궁궐에서 돌아오는 즉시 귓속말로 속삭였을 것이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내가 오늘 말이야 정말 기막힌 것을 보았는데 이건 정말 비밀이야. 비밀이 밖으로 새 나가면 당신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자 들어봐!” 하면서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건 비밀인데...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비밀이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은가. 근본적으로 이발사의 비극은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실체를 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은 말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가 없었다는 데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정말 건강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곁에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갈대숲을 찾아가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지 살 방법을 찾은 것이 아니다. 결국 문제는 땅 구멍이나 갈대숲이 아니라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황에 억눌려 말할 수 없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과 혀를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머리와 가슴의 기운을 원활하게 순환시킨다는 뜻이다. 이는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것이며 속 시원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고여 있던 물이 물 코가 터지면서 순환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어머니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멍든 며느리가 혼자 노래방에 들어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대는 것은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아무도 없는 노래방에서 마음껏 흔들어 대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혼자 방에 들어가 소리 없는 눈물로 삭이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노래방 역시 갈대숲처럼 한계가 있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내 말을, 내 외침, 내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제대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한쪽만 말하고 한쪽은 듣기만 하면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였다. 죽고 죽이는 서슬이 시퍼런 상황에서도 소통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침묵하지 아니하고 할 말을 하는 사람을 기개 있는 사람으로 우대하였다.


좋은 예가 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고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정몽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는 정몽주에게 저 유명한 시조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그의 의중을 떠본다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칙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엵여져 백 년까지 살아보자”


이 시조를 들은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정몽주는 죽더라도 고려왕조와 함께 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준다. 정몽주는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그것도 갈대숲이 아닌 칼을 쥔 자에게 말이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기개를 높이 샀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그를 제거한다. 그런데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정치판에서 욕설이 아닌 시조를 주고받으며 자기의 의사를 당당하게 표명하는 그들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과거의 정치인은 자기 뜻에 반한다고 죽일 놈으로 매도하고 의장석을 점령하고 피 터지게 몸싸움하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지 않았다. 방원은 훗날 태종이 되어 정몽주를 복권시킨다. 비록 뜻은 달랐지만 그의 충절을 높이 산 것이다. 정치적 의견을 달리 한 두 사람이 시조를 통해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낭만적인 정치적 행보다. 하긴 술값 대신 기생의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 주던 사람들이 과거의 한국인이었다. 물론 오늘날 술집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간 미친놈 취급받고 쫓겨나거나 신고당하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상대방이 정적이든 기생이든 소통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통하기 위해서는 윽박지르지 않고 귀 기울이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갈대숲이 바람결에 소리를 낼 수는 있었지만, 이발사에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인간처럼 화답할 수는 없다. 이것이 곧 이발사의 비극이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다면 행복은 요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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