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용법
요즘의 나는 참 이상하게 평화롭다. 뭔가를 억지로 이뤄낸 것도 아니고, 특별한 전환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음이 괜찮다. 더는 조급하지 않고,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이 어딘가에서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아마도 조금씩 나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준 순간들이 쌓였기 때문에 가능한 마음일 것이다.
예전에는 나 자신에게 많은 걸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해야 할 것들을 끝없이 뒤로 미뤘고, ‘이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하자’고 생각했던 일들이 수북했다. 여행도 그랬다. 콘서트도, 페스티벌도, 좋아하는 걸 사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늘 ‘돈이 아까워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서’라는 이유를 들이밀며, 스스로를 설득하곤 했다. 그렇게 미뤄진 시간들이 쌓여 어느새 나는,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는 사람처럼 굳어져 있었다. 욕구를 없앤 것이 아니라, 감춰둔 것인데도.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마음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더 이상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 앞에 머뭇거리지 않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을 하는 게 가장 나다운 선택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 선택을 더는 눈치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미뤘던 여행을 떠났고, 망설이던 공연 티켓을 결제했고, 괜히 죄책감을 느꼈던 ‘나를 위한 지출’을 조금씩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내 안의 어떤 감정이 부드럽게 풀리는 걸 느꼈다. 억눌렸던 기쁨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감각이 생겼다.
그 감정은 생각보다 컸다. 단순히 ‘즐거웠다’는 수준을 넘어서, 내 안에서 뭔가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것을 나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다는 안정감.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평화였다. 평화란 아무 일 없이 조용한 날에만 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갈증을 알아차리고, 그걸 물처럼 적셔주는 순간들 속에 피어나는 감정이었다. 나를 미뤄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소중히 여기는 감각에서 오는 조용한 충만함.
살다 보면 평화는 늘 뭔가를 다 이루고 난 다음에나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누구에게 인정받아야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안다. 평화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고, 그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어떤 삶을 허락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고, 조금 더 용감해졌다. 무엇보다 나에게 관대해졌다. 그 관대함은 게으름도, 무책임함도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 기다려온 이해의 감정이다. 나를 너무 오래 뒤로 밀어놓았던 시간들에 대한 사과이자, 앞으로의 나를 더 잘 살게 해주기 위한 선택이다.
요즘 나는 그런 선택을 하고 있다. 나를 미루지 않는 선택,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아깝지 않게 마음을 쓰는 선택. 그렇게 내 마음을 조금씩 채워가다 보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충만한 날들이 찾아왔다. 평화는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오히려 작고 사소한 순간에서 피어난다.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는 마음,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수 있는 시간, 그게 바로 내가 느끼는 평화의 정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중에’라는 말로 나를 미루지 않기로 했다. 그 ‘나중’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 마음이 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감정,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따뜻한 공기처럼. 나는 그 속에서 오늘도,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