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용법
나는 원래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말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았고, 감정의 물결이 크지 않았고, 무언가에 깊이 빠지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쪽이 더 편했다. 그렇게 둔감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냥 그런 성격이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침착하고, 상황을 조용히 흡수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내 삶이 덜 복잡해질 것 같았고, 솔직히 그게 나에게 맞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나는 점점 더 무뎌져 왔다. 그건 원래 그랬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그렇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보니까 감정이 너무 선명하면 더 힘들고, 마음이 너무 민감하면 쉽게 지치고, 다 느끼고 살기엔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거칠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무뎌지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선택한 거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내 마음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감정을 한 박자 늦게 느끼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말도 바로 나오지 않았고, 서운한 마음도 뒤늦게 알게 됐고, 기뻐야 할 일 앞에서도 마음이 금방 차오르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냥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하고 넘겼지만, 요즘은 가끔 헷갈린다. 이건 정말 나의 본성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감정을 눌러오다 보니 내 마음이 스스로를 잠가버린 건 아닐까. 살기 위해 감각의 문을 조금씩 닫은 건 아닐까. 어릴 땐 크게 느끼지 못했던 슬픔이 요즘 들어 조용히 밀려오고, 예전엔 넘겼던 말 한 마디가 밤이 되면 마음을 쿡 찌른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너무 자주 눌러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게 안에서 부풀었다가 터지듯 나온다. 나는 원래 무뎠던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오래 참아왔던 거다.
나는 큰일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아마도 흔들릴 여유조차 없이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든 결과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대신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체념,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나는 점점 말이 줄었고, 감정의 색깔도 흐릿해졌다. 감정의 파도를 타기보단, 그 파도를 그냥 눈으로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고, 그렇게 서서히 나는 무뎌졌다. 그게 나를 덜 다치게 만들어줬고, 동시에 덜 살아 있는 느낌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늘 괜찮은 척을 잘했고, 웬만한 일엔 잘 무너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만큼 감정의 창을 닫아둔 채로 살아온 거였다.
그래서 요즘은 문득 문득 생각한다. 이 무뎌진 마음이 나를 보호한 동시에, 나를 잃어버리게 만든 건 아닐까. 나를 살게 만든 동시에, 나를 덜 느끼게 만든 건 아닐까. 감정을 잃은 게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법을 잠시 멈춘 채로 버티는 방식에 익숙해진 것 같다. 때로는 그게 자랑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뎌짐조차도 나의 일부라고 인정하고 싶다. 나는 그냥 살아남고 싶었던 거고, 그렇게라도 나를 지켜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다. 무뎌진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살아온 내가 대단했던 거라고, 조용히 말해주고 싶다.
나는 여전히 아주 선명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감정을 금방 꺼내지도 못하고, 어떤 순간엔 여전히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눌러왔던 거라는 걸. 그래서 지금은 천천히 다시 느끼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아주 작게 기쁜 일을 놓치지 않고, 괜찮지 않은 날엔 그 말을 그냥 꺼내보고, 무뎌진 나에게도 여전히 감정이 살아 있다는 걸 조금씩 믿어보려 한다. 그렇게 나를 조금씩 다시 만나는 중이다.
무뎌진 내가 예전보다 못한 사람이 된 건 아니라는 걸, 이젠 안다. 그저 마음을 덜 쓰는 방식으로, 감정을 덜 흘리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법을 바꿔온 것뿐이라는 걸 나에게서 사라진 게 아니라, 나에게 남기 위해 조금 덜 꺼내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렇게 나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조용히 마음을 지나가고 있다.누구도 모를, 나만 아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