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사용법

by 찌니


요즘 나는 딱히 바쁜 것도 아닌데 하루가 금방 끝나 있다. 무언가를 한 것도 없고, 뚜렷한 일정을 소화한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다.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고, 필요 없는 영상 몇 개를 보다 말고, 할 일은 미뤄둔 채 그냥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스스로도 안다. 이건 휴식이 아니다. 피하고 있는 거다. 어딘가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인지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나는 지금 계속해서 뭔가를 외면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고, 마주해야 할 감정이 있음을 알지만, 그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둔다. 지금은 그거 말고 이걸 해야 할 것 같고, 잠깐만 다른 걸 하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아서 계속 딴 길로 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 있다. 그리고 그 하루 끝에서야 스스로를 책망한다. "왜 또 이렇게 보냈을까." "왜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또 나를 실망시키고, 그러면서도 내일은 다를 거라며 괜히 다짐한다. 그리고 그 내일이 오면, 또 같은 방식으로 나는 나를 피한다.

사람들은 무기력하다는 말을 쉽게 쓴다. 나 역시도 오랫동안 내가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건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나름대로 에너지를 쓰고 있다. 생각도 많이 하고, 마음도 쏟고, 감정도 움직인다. 다만 그 방향이 자꾸 엉뚱할 뿐이다. 본질을 향해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주변부만 맴도는 느낌. 마치 방 안을 뱅뱅 도는 사람처럼, 분명히 계속 걷고 있는데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기분. 그게 요즘의 나다.

나는 지금 어떤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마주치면 흔들릴 걸 알기 때문에, 직면하면 감정이 너무 커질 걸 알기 때문에, 아예 보지 않는 쪽을 택하는 거다. 그렇게 감정을 밀어두고, 생각을 억누르다 보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 믿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외면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 채 다시 찾아온다.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자괴감으로, 어떤 날은 무력함이나 무의미함 같은 얼굴로 나를 덮친다. 그래서 더 피하게 된다. 그 반복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피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겁이 많을까. 왜 이렇게 자주 도망칠까

무엇이 그리도 무서운 걸까 뭘 그렇게 지키고 싶어서, 무엇을 그렇게 감추고 싶어서 자꾸만 눈을 돌리는 걸까 그러면서도 또 안다. 피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건, 어쩌면 이미 마주할 준비가 조금은 되어 있다는 뜻이라는 걸. 내가 지금도 이렇게 자꾸 그 감정을 떠올린다는 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진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걸

회피라는 건 단지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방향을 틀어버리는, 일종의 생존 방식이다. 피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계속 그걸 기억하고 있고,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회피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절대 완전히 잊히지 않기 때문에, 더 지치고 더 불안해진다. 나 역시도 그런 감정의 반복 속에서 지쳐가고 있다. 잊은 척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진짜로 마주하는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걸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이제는 조금씩 연습해보려고 한다.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회피하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애써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이 감정이 여기 있다는 걸 인정해주는 것부터. 피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밖에 없던 그 순간의 나를 이해해보려는 것. 그 마음이 먼저다. 행동은 그다음이어도 괜찮다. 오늘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믿고 싶다.

나는 지금도 피하고 있다.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나를 속이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마주치지 않으려 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조금씩 방향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낀다. 도망치는 나도 나다. 감당하지 못했던 나도, 애써 침묵했던 나도, 사실은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던 거다. 언젠가는, 진짜 언젠가는, 더는 피하지 않고 내 앞에 선 그 감정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지금의 이 느린 시간도 의미 있는 걸로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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