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하루,창밖만 보는 여자

이름 없는 사람들

by 찌니



그녀를 처음 본 건 버스 안이었다. 매일 아침, 거의 같은 시간, 같은 자리. 창가 쪽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린 채 바깥을 오래 바라보던 여자. 휴대폰을 꺼내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았고, 졸지도 않았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이라기보단, 목적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시의 풍경이 바뀌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유독 느리게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몇 번이고 마주쳤다. 같은 버스, 같은 자리, 같은 창밖. 하지만 그녀는 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너머엔 무엇이 있었을까. 일상에 대한 권태였을까, 아니면 너무 많은 말이 쌓여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사람은 가끔 그저 ‘바라보는 일’만으로 하루를 견딜 때가 있다.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것들을 보기만 하면서,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잠시 잊으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지만, 그 무표정 속엔 이상하리만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멀어지는 건물들, 사람들, 신호등, 비 오는 창문.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차마 안쪽으로는 돌릴 수 없는 마음을 바깥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말로 감정을 풀어내고, 누군가는 눈물로 쏟아내지만, 그녀는 그저 바라봄으로써 감정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감정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어떤 감정은 말이 되지 않는다. 형체를 갖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들이 있다. 특히 삶이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을 때, 우리는 문득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모르게 된다. 그 순간, 창밖은 하나의 거울이 된다. 내가 아닌 것들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을 비춰보는 시간. 그녀는 매일 그 창문 앞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진짜 고독할 때, 창밖을 본다.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벅찰 때, 우리는 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바깥’은 곧 내 마음의 연장선이 된다. 멀어지는 것들에 시선을 주면서, 스스로와 적당한 거리를 두려는 마음. 그녀는 아마도, 그 거리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매일 같은 길을 달리는 버스. 하지만 그녀는 아마 단 한 번도 같은 마음으로 그 창밖을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똑같은 풍경도, 똑같은 시간도, 감정의 빛깔이 다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어제는 그리움이었고, 오늘은 허무함이고, 내일은 조금의 기대일 수도 있는 마음. 나는 그녀를 보며, 사람의 하루가 얼마나 복잡하고도 다정한 감정으로 얽혀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침묵으로 다져진 하루 속에도 누군가는 감정을 품고, 애쓰지 않고도 버텨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목적지에 도착해도 서두르지 않았다. 버스가 멈추고도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용히 내렸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자리에는 그녀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의 풍경 속에서도, 그런 마음은 분명히 존재한다. 누군가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이름 없는,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감정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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