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하루, 고양이에게 말 거는 여자

이름 없는 사람들

by 찌니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이른 저녁이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붉은 빛이 공원의 벤치와 잎 사이를 스치던 시간. 그녀는 공원 끝자락 벤치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엔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스치는 풍경이라 생각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 몇 번이고 시선이 멈추는 걸 느꼈다. 그녀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조용하고 또렷하게, 마치 진짜 대화라도 하듯. “오늘은 좀 덜 추웠지?”, “어제 못 봐서 걱정했어”, “밥은 잘 챙겨 먹었니?” 그녀의 말에는 과장도, 연기도 없었다. 오히려 낯설 만큼 자연스러웠다. 대답 없는 존재를 향해 건네는 목소리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위로를 느꼈다.

우리는 대개 말을 대답을 위해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듣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그녀는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는 형식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 고양이는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있었을 것이다. 대답 없는 대화 속에서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은 말을 꺼낼 수 있다. 왜냐하면 상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오해받을 걱정도, 의도하지 않은 침묵도 없다. 그런 말은 타인과 나누는 말보다, 자신을 향한 말에 더 가깝다. 그녀는 사실, 고양이에게 말하는 척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어떤 상담보다도 정직한 자기 돌봄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매일 그 자리에 나왔다. 어떤 날은 고양이가 멀리 풀숲에서 그녀를 지켜보았고, 또 어떤 날은 아예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고양이가 있든 없든, 그녀는 그 벤치에 앉아 조용히 말을 걸었다.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사람은 마음이 복잡해질 때, 그것을 꺼내어 정리할 공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은 그걸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해보려 애쓰지만, 어떤 사람은 그 과정에서 더 많이 상처받는다. 그래서 침묵하고, 대신 아주 작은 틈을 찾아 혼자서 말하는 연습을 한다. 그녀는 그런 연습이 오래된 사람 같았다. 감정을 무리해서 쏟지 않고, 그저 묵묵히 말을 건네며 하루를 정리하는 사람.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도,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 앉는 자세와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감정을 조용히 다루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감추는 사람과는 다르다. 감추는 사람은 두려워서 피하지만, 다루는 사람은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익힌다. 그녀는 조용히, 무리하지 않게, 자기 속도로 감정을 다루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태도가 어쩌면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가장 단단한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말을 잃는다. 그리고 그 말을 되찾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어떤 이는 글을 쓰며, 또 어떤 이는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말들을 되살린다. 그녀는 그 말을 ‘고양이에게 건네는 대화’라는 방식으로 되찾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더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망이 반복된 관계, 감정이 닿지 않는 대화들 속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에게 말하기’였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녀에게 고양이는 고양이 그 자체로도 충분했지만, 동시에 침묵하는 가장 이상적인 청자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벤치 위에 살며시 올려두고는, 조용히 걸어 나갔다. 고양이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고, 그녀 역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말할 것을 다 말한 사람처럼, 더는 미련 없이 사라졌다. 그 벤치 위에는 작은 캔 하나와, 접힌 종이쪼가리 같은 것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열어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그녀는 그런 식으로 오늘 하루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조용히 견뎌낸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벤치를 지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녀가 또 와 있을까, 고양이는 나타났을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허전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그녀의 하루는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고, 나의 하루는 그 기억으로 인해 조금 더 다정해졌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 벤치에서 그녀가 했던 말들은, 이제 내 안에서 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인 거야." "잘 버텼어." "괜찮아, 정말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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